6·25 괴산전투 영웅 이만하씨|그날의 격전 눈앞에 생생한데…|38년만에 뒤늦은 무공훈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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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25의 전쟁터에서 눈부신 무공을 세워 우리나라최초의 화랑무공훈장수상자로 상신됐으나 제대후「병적」상 행방불명으로 처리되는 바람에 무훈의 용사로 남았던 60노병이 38년만에 훈장을 되찾는 감격을 안았다.
충북괴산전투의 영웅이었던 예비역 일등상사 이만하씨(60·경남창원시 대원동동양상가아파트C동205호).
『내 영혼을 되찾은 기분입니다. 빛바랜 훈장을 들여다보면 전쟁터에서 숨져간 전우들의 절규가 들리는것 같아 가슴이 멥니다.』
이씨는 38년만에 주인손에 돌아온 화랑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눈시울을 붉혔다.
정부가 이훈장을 이씨에게 수여키로 결정했던 시기는 전쟁중이었던 50년 12월30일. 그러나 이씨가 전투중 부상해 후방으로 후송된데다 제대후 병적이「행방불명」으로 처리되는 바람에 훈장은 주인을 잃었다.
이씨가 군에 입대한것은 46년2월25일. 경기도 광주중 3학년을 중퇴한 이듬해 18세의 어린나이로 국군의 모체인 조선국방경비대1기생으로 자원입대했다.
입대 4년째인 50년 6·25가 터졌다. 이날 11연대주번사령으로 근무했던 이씨는『새벽의 정적을 깨고 울리는 포성을 들었을때의 불길했던 예감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고 했다.
6·25발생 탓새만인 6월30일 새벽, 이씨는 3대대에서 자원한 특공대 28명을 이끌고 충북 괴산지구 전투에 참전, 적후방까지 침투해 북괴군 수색중대를 섬멸했다.
이전투에서 그는 적사살18명·생포2명·박격포1문·기관총2정·소총30정과 탄약·식량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훈장을 받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다만 포로2명을 인계할때 미군고문관이 은성무공훈장을 받을수 있을것이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고 회상했다.
이 전투후 이씨는 숨돌릴틈도 없이 전장에 다시 배치됐다.
그러나 이튿날인 7월1일 괴산전투에서 적탱크에 수류탄을 던지며 공격하던중 전차포 파편을 맞고 의식을 잃은뒤 제2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그해9월 문병온 11연대인사장교로부터 9월5일자로 육군소위에 현지임관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전시중 육본 특명이 하달되지않아 끝내 51년9월30일 일등상사계급으로 예편하고 말았다.
이씨가 자신의 병적이 행방불명처리된것을 알게된것은 59년. 당시 군 문관시험에 응시하려고 병적증명을 청구하면서였다.
「군번 5300107, 이만하, 입대 46년2월25일, 생년월일 기록무, 49년8월15일 행방불명」. 호랑이소대장의 기록 전부였다.
이때부터「행방불명된 명예」를 되찾기위해 발벗고 나섰다. 병적이 밝혀지지않아 취업도 할수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당정부에서부터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 20여차례 진정·탄원을 했으나 그의 노력은「행불」이란 딱지로 번번이 허사가 되곤했다.
국방부에서도 30년전의 군복무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대답뿐.
이씨는 하는수없이 옛전우들을 찾아 자신의 병적사실을 확인키로 했다.
드디어 작년10월 조선국방경비대 하사관1기동기생으로 입교했다가 육군사관학교졸업후 당시 11연대 대대장을 지낸 김재명예비역중장 (전 서울지하철공사사장) 을 찾았다. 이어 제주도근무시절 군수참모를 지낸 유근창 예비역중장등을 만나 옛 전우임을 확인했다.
자신이 국군최초의 화랑무공훈장 수훈자라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이로써 이씨는 제6공화국 출범직후인 지난4월 마지막으로 노태우대통령에게 전공사실확인및 군복무당시사진·군경력등 13종의 증빙자료를 갖춰 탄원서를 냈다.
이후 정부는 탄원서를 토대로 6·25전사와 문서기록을 면밀히 검토한뒤 컴퓨터조회를 거쳐 병적을 확인하고 지난5월16일 국군최초의 화랑무공훈장을 노병의 가슴에 안겨줬다.
『전공을 세우고도 병적확인이 안돼 취직도 못하고 막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다』며 때늦은 감격으로 울먹이는 이씨.『이제 남은여생만이라도 조국을 위해 육신을 던질 생각』이라고 각오를 밝히는 이씨의 얼굴에는 아직도 호랑이소대장시절 특공대의 투혼이 살아있는듯 했다. <창원=허상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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