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공급 독점권 "아직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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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후 부산항 제4부두. 높이 30여m의 트랙터 크레인과 지게차들이 부두에 접안한 네 척의 배에 화물을 싣고 내리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정문엔 컨테이너 차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선박 위 항운노조 소속 인부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모습이었다. 중국행 화물을 싣는 루펭호에서는 앞쪽에 짐이 실릴 땐 뒤쪽 인부는 앉아 쉬었다. 육상에서 일하는 두 명도 차량의 컨테이너 잠금장치를 채우거나 푸는 것이 고작이다.

루펭호엔 노조 1개 반원(16명) 중 8명이 배치됐으나 실제로 작업을 하는 조합원은 5명뿐이었다. 이들의 작업 모습도 바삐 오가는 장비와는 달리 한가해 보였다.

검찰의 항운노조 비리 수사로 부산항운노조가 '항만 인력 독점공급권 포기' 등 자체 개혁을 선언한 지 지난달 31일로 1년이 됐다. 검찰은 지난해 1월부터 6월까지 전국 항운노조의 채용 비리 등을 수사해 35명을 구속하고 14명을 불구속 입건했었다.

그동안 노조위원장 직선과 노조원 감소(200명) 등 겉으로는 변화가 있긴 하다. 그러나 항운노조 개혁의 핵심인 인력 독점공급권과 화물 처리 물량에 따라 노임을 지급하는 '도급제'는 변하지 않아 하역회사의 불합리한 인건비 부담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 사용자 불만 여전=부산항운노조는 지난 1년 동안 노조원이 3600명에서 3400명으로 200명 줄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자체감축이 아니라 정년퇴직 등 자연감소 인력을 충원하지 않은 결과다. 더욱이 인력은 줄어도 하역회사가 항운노조에 지급하는 인건비는 줄지 않았다. 도급제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부산북항 일반부두에서 화물 처리를 가장 많이 하는 4부두를 운영하는 동방.국제통운은 지난 1년 동안 17억원짜리 트랙터 크레인 네 대를 설치했다. 컨테이너를 11줄 5단까지 쌓을 수 있는 장비다. 4줄까지 작업할 수 있던 지게차에 비해 능률이 높아진 덕분에 처리 물량이 10% 정도 늘었다.

그러나 하역회사 관계자는 "좋은 장비를 설치해 사람이 할 일은 많이 줄었으나 인건비는 종전대로 나가기 때문에 회사에 실제 이익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하역장비 현대화 등으로 선박 한 척에 배치되는 인부 16명 중 10명만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며 "하역회사가 필요한 인력만큼 쓸 수 있도록 하는 상용화(常用化)가 하루빨리 시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얼마나 변했나=부산항운노조는 지난해 3월 인력 독점공급권 포기와 함께 인력 상용화에 대비해 신규채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 간접선거로 뽑던 위원장을 직접선거로 뽑았으며 위원장이 임명하던 지회장도 조합원이 직접 선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의결기구인 운영위원회의 위원을 30명에서 50명으로 늘려 현장 조합원의 참여를 확대하기도 했다.

조영탁 부산항운노조 위원장은 "위원장 권한을 줄이고 조직을 보다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강진권 기자

관련 법규 정비되면 독점권 사라져

하역회사 등 사용자가 부두 노무자를 직접 고용하는 '상용화' 시행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상용화는 지난해 3월 부산항운노조가 100년 동안 행사해 온 항만노무 독점 공급권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추진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5월 6일 해양수산부와 전국항운노조연맹 등이 부산항과 인천항 노무자의 상용화에 합의, 9월 '항만 인력 공급 체제의 개편을 위한 지원 특별법'이 국회에 제출돼 12월 통과됐다. 이 법은 지난달 24일 발효됐다.

이 법은 조합원이 돼야 부두 노무자로 일할 수 있는 '클로즈드숍' 대신 하역회사가 노조원을 채용, 상시 고용 형태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 채용한 조합원에게는 종전 수준의 월급을 주고 정년을 보장한다. 고용되지 못하는 조합원에게는 생계안정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마련되지 않아 시행이 늦어지고 있다. 하역회사의 항운 노조원 채용 기준과 생계안정지원금 충당 주체 등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항운노조는 상용화 관련 용역 결과가 이달 초 나오는 대로 협상안을 마련, 조합원 투표를 하기로 했으나 상용화에 반대하는 조합원이 적지 않아 진통이 예상된다.

부산항운노조의 한 간부는 "젊은 조합원은 상용화를 통해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으나 나이 든 조합원은 채용되지 않을까봐 불안해 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부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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