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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구자춘 "애들 저금통까지 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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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김종필씨등 거물 정치인들에 이어 단행한 2차 연행조치로 18년간 이 나라를 주물러온 구여권은 여지없이 궤멸됐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감투쓴 도둑」으로 매도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들의 축재 경위가 어떤 것이었든 맨 몸으로 출발한 5·16이후 각종 공직을 거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변명도 어려웠다.
사실 국민들은 당시 수사목적과 과정의 정당성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뭔가 시원하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이들은 국민들의 갈채 속에 동정받지 못하는 핍박자가 되고 말았다. 아무도 그들을 핍박한 사람들이 정권 장악을 노리고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일 밝혀졌지만 신군부의 비리·부패 척결 작업은 정권 획득을 위한 혁명적 민심 수습 방법에 비중이 더 두어졌었다. 그리고 그 같은 수법은 바로 구여권이 5·16 쿠데타 이후 구사한 것과 비슷했다.
「5·16」이라는 교과서를 습득한 후배 군인들은 선배들이 상대방을 제거하는 방법을 잘 배워 실천한 셈이다. 상대방의 각종 비행을 추적, 조사해 자료화한 뒤 필요한 때 그것을 증거삼아 일격을 가하는 고전적인 수법이 바로 그것이다.
계엄사가 밝힌 연행인사들에 대한 비리·부패행위 모음은 하루 이틀에 걸쳐 작성된게 아니라 중앙정보부·보안사·경찰등이 오랜 세월동안 공들여 정리해둔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료들이 정적인 야당 인사들에게만 사용되리라는 것은 착각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은 야당 인사뿐 아니라 자신의 심복들에 대해서도 신상문제를 면밀히 관찰하고 비리 여부에 관한 자료를 꾸준히 수집시켰다. 이 자료가 신군부에 의해 유효적절히 사용된 것이다.
계엄사가 구자춘 전내무장관의 수사 결과 발표에서 20년전인 61년의 비리까지 들춰내고 62년 충남도경국장 시절 대전시내 상공인들로부터 세찬비조로 1천만원(80년 가격 1억4천만원) 받은 걸 밝힌 것을 보면 그런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구씨는 서울시장 재직때 L호텔 사장에게서 호텔 신축 사례비로 1천만원을 받은 것을 비롯, 61년부터 78년까지 도경국장·도지사·서울시장을 역임하면서 1백30여회에 1억9천여만원(80년 가격7억3천만원 해당)을 챙겨 부동산 매입등에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수사기관이 단기간에 밝혀낼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었다.
보안사 장교였던 R씨는 이같은 자료들은 구씨 자신이 도경국장·내무장관 등으로 있으면서 직접 지휘했던 경찰 또는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수집된 것이라고 실토했다.
이른바 박정희 대통령시절 한창 위세를 떨친 정보·공작정치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구씨와 마찬가지로 서울시장·내무장관을 지낸 김현옥씨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계엄사는 김씨가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66년 세종로 지하도공사를 D산업에 시공토록 해주고 사례비로 2백만원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내무장관으로 있으면서 S방직의 노사분규에 경찰을 투입, 해결해준 뒤 3백만원을 챙겼다고 밝혔다.
또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이 모두 6천1백만원(80년 가격 3억6천만원)이고 아들이 세칭「칠공자」라는 별명으로 온갖 물의를 일으키고 다녔는데도 이를 묵인·비호했다고 망신을 주었다.
당시 보안사에 근무한 한 관계자는 『복마전이라는 서울시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사람은 털기만 하면 무엇이든 나온다는 선입견과 그런 사람은 패면 팰수록 국민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김씨를 잡아들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불도저」란 별명처럼 공직에 있을 때 적지 않게 무리수를 써 국민적 이미지가 좋지 않아 부담없이 망신을 줄 수 있었다고도 했다.
김씨는 계엄사에서 풀려난 뒤 미국 도피설이 나돌았으나 81년5월 경남양산군소재 장안중학 교장으로 취임, 시골 학생들과 어울리며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최근 구속된 염보현 서울시장의 경우에서도 보듯 지방의회의 간섭없이 방대한 예산을 주무르는 서울시장 자리는 힘있는 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영욕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
정보 관계자들은 『서울시장을 지내고 나면 개인 자료철이 한참 두툼해진다』고 말한다.
13대 총선에 당선, 그런대로 명예를 회복한 구자춘씨는 당시 계엄사의 발표내용에 대해 36일간 구금돼 있었지만 보도된 사실을 자신에게 확인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자기와 관련된 내용을 누가 참고진술했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7억3천만원 어쩌니 하지만 당시 내 재산은 김을 포함, 4억원 정도 됐을 겁니다. 자식의 돼지저금통, 집사람의 금반지까지 긁어모으고 1백만원 남짓한 그림 두 점을 수천만원 짜리라고 부풀리는 등으로 만든 겁니다. 또 경북지사 시절 창립된 대구은행의 주식을 시민들이 사도록 권유하기 위해 기관장들이 앞장서 30만원 어치를 샀는데 그것도 가져갑디다.』 구씨는 자신을 「치사하게」 보이도록 한 계엄사 측이 정말 치사하다고 힐난했다.
『세찬비니, 전별금이니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관습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유지들이 판공비에 보태라거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내놓는 것으로 지나치지만 않으면 관행이라고 보아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전근할 때 역두에서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해 어쩔 수 없이 받는 수가 있습니다. 물론 반대급부를 노리고 돈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요. 그리고 받은 돈은 기관 운영비나 직원 복지비로 넘겨주기도 합니다.』 구씨는 세찬비 등을 받아 넣은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면서 그것을 빌미로 망신시킨 것을 분개한다.
『79년12월 내각 일괄 사표때 내무장관을 물러난 다음 80년3월 미국조지타운대학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단기코스였죠. 귀국하려니까 가족·친지들이 JP도 잡혀가고해서 다칠지 모르니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젊은 사람들이 설칠 때 조심하라는 거죠. 국내에서도 돌아오지 말라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돈을 갖고 나간 것도 아니어서 7월 초순 자진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보름여 만에 보안사에 끌려갔습니다. 폭행은 안 당했지만 욕을 보게된 겁니다. 당시는 정당원도 아니고 신군부를 비방하거나 도전할 의사도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씨는 이제 와보니 자신을 그렇게 만든 제5공화국 인사들이 『더이상 부패할 수 없을 만큼 「부패의 극치」 를 실천했다』 고 힐난했다.
또 고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이 독선적이고 독재를 했지만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함께 고초를 겪은 고재일 전건설장관은 막대한 치부설로 1차 대상에 거명 됐다가 「준거물」로 평가돼 2차로 밀린 케이스.
최종 관직이 건설장관이기는 했으나 관련 비리가 모두 조달청장·전매청장·국세청장 시절의 문제라 「차관급」으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청년부터 5년여 동안 국세청장을 하며 세무사찰과 숙정이란 칼을 휘두른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계엄사는 고씨가 직제에도 없는 연합조사반이라는 기구를 편성, 운용하면서 돈을 뜯어냈다고 했다.
J산업 C사장으로부터 협조비 명목으로 2천1백만원, D나일론 C사장으로부터 징세 유예조치 사례금조로 2백만원, S산업 B회장으로부터 담배 필터 허가사업을 해준 댓가로 자동차 1대를 받는등 69∼80년 사이 80여회에 걸쳐 모두 1억1천여 만원을 챙겼다고 공개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각급 정보·수사기관 자료철에 명시돼 있었을뿐 아니라 기업이라는 제공 당사자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된 사실에 대해 별도로 밀고 당길 필요가 없었다.
80년 이후 자택에서 칩거하며 독서등으로 소일하고 있는 고씨는 『여러 기관장을 하면서 인사때 사람을 많이 잘라 원한을 사기도 하고 정치적인 관계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며 『80년 몇몇이 작당해 일을 꾸몄고 이들이 현직에서 떵떵거리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화를 입은 것은 자신의 축재보다 「돈냄새」 나는 기관의 장을 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구여권 인사들 중에는 고박정희 대통령이 못마땅한 인사나 기업이 있으면 『고재일과 상의해서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고씨는 끗발도 세었겠지만 그만큼 섭섭해하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김현옥·구자춘·고재일씨가 「자리」 때문에 곤욕을 겪었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계엄사쪽 관계자들은 『연행된 사람들 대부분이 JP등이 잡혀가니까 위기를 느껴 사전에 재산을 빼돌렸고 그들의 축재와 상식을 넘는 행동이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게 사실』이라며 『이제 와서 5공화국이 몰리고 민주화가 되니까 멋대로 자기 변명을 하고 다닌다』고 반박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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