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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의 귀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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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국은 전사자 유해 수습에 유별난 집념을 보여 왔다. 사례를 하나 보자. 소련이 막 무너진 1991년 12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최대 현안은 러시아가 소련 몫이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이어받는 문제였는데, 부시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면서 불쑥 러시아 땅에서 미군 유해를 찾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이 새로 태어난 러시아에 처음으로 한 요구가 미군 유해의 수습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북한 두만강변에서 피격돼 소련에 떨어진 B-29 폭격기 조종사와, 58년 터키에서 훈련 중 국경을 넘어 소련 아르메니아 공화국에 추락한 비행기 승무원의 유해 등이 대상이었다. 옐친은 협력을 약속했고 미국은 이듬해 러시아에서 작업에 들어가 18구의 유해를 발굴해 갔다.

유해 수습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악의 축'으로 부른 북한과도 서로 협력할 정도다. 미국은 96년 7월부터 북한에서 유해 찾기를 해 왔다. 한국전쟁 때 격전지로 미군이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남겼던 평북 운산과 함남 장진호 부근에 수십 명의 미군 요원이 들어가 북한군의 협조 아래 작업을 진행했다. 미국은 핵 문제로 얼굴을 붉히고 대북 경제봉쇄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북한에 1500만 달러의 사례비를 줬다고 한다. 전사자 유해 수습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미 캘리포니아주 산속에서 발견된 유골이 63년 전 추락사고로 숨진 미군 비행훈련생의 것으로 밝혀져 지난주 고향에 안장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미군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은 하와이에 있는 전쟁포로.행방불명자 합동조사본부(JPAC:Joint POW/MIA Accounting Command)가 담당한다. 30년 노하우의 미군 신원확인 중앙연구소와 10여 년간 현장경험을 쌓은 유해발굴 합동 태스크포스팀을 합쳐 2003년 출범한 조직이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Until they are home)'와 '우리는 기억한다(We remember)'가 이들의 모토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한 연설에서 이를 인용해 "정부는 모든 전사자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절대 편히 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국군도 내년 1월 '국방유해발굴감식단'을 만들어 한국전쟁 전사자와 국가유공자 유해 발굴에 박차를 가한다고 한다. 기대가 크다. 전쟁의 기억이 아무리 희미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잊는 건 도리가 아니다.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