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레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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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불과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강원도태생의 작가 김유정은 일찌기 강원도 여성의 특질을 이렇게 말한바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대로 틉틉하고도 질긴 동갈색 바닥에 근실한 이목구비가 번듯 번듯이 서로 의좋게 놓여 있읍니다. 다시 말하자면 싱싱하고도 실팍한 원시적 인물입니다.> 이 글 속에 담겨진 두 가지 의미를 깊이 음미해 볼만하다. 그 하나는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원시」에의 향수다. 그가 작품활동을 벌인 것은 고작 3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기간 중 씌어진 25편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그의 풋풋한 고향 내음을 담고 있으며, 고향 사람들의 강인하고 집요한 원시적 생명력이 신선하게 펼쳐지고 있다.
서정성이 상실돼가고 있는 오늘날, 고향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있어서 『동백꽃』『소낙비』『산골나그네』와 같은 유정의 주옥같은 단편들이 새삼스런 정겨움으로 다가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향에 대한 유정의 열정적 집착은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23세이던 1931년 오랜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증리(일명 실레마을)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했다는 기록에서도 찾아진다.
이때 유정은 「농지회」를 조직하여 공동 구판 사업을 전개하는가하면 「금병의숙」이란 야학당을 만들어 고향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터주는 등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농촌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곳 실레마을 사람들에게 유정은 당대의 대표적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고향발전의 선구자」로서도 오래도록 가슴속깊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와 같은 고향 사람들의 유정에 대한 추모가 그의 사후 51년만에 현실로 영글어져 실레마을을 다민속 마을로 조성하는 사업이 전개되고 있는 가보다.
당시화재로 소실됐던 금병의숙을 복원, 전시관을 만들어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용품을 수집, 전시할 예정이며 『동백꽃』의 소재인 산동백 나무를 마을 주위에 심는 등 유정의 업적을 기리고 애향심을 되새긴다는 것이다. 유정의 표현대로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동백꽃의 냄새가 잃어버린 고향의 냄새를 되살려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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