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남자의 책 이야기] 비만, 문학서도 퇴출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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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의 계절이 왔다. 그런데 요즘은 '말이 살찐다'는 이 표현에서 가을의 풍요를 느끼기보다는, 먼저 '비만'이라는 불길한 망령을 떠올리고는 기분나빠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잘 먹고 잘 살다 보니, 체중계에 눈 돌리기 겁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흙탕물 같은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우리가 애용하는 물안경인 문학은 언제부터 '비만'에 눈을 떴을까? 가령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처럼 중년을 맞은 황지우가 자기 사진을 들여다 볼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송이 국화꽃'처럼 만개한 삶의 연륜이 아니라 '비만'이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이 사나이"('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에서). 한국 문학은 살찐 소파처럼 되어버린 이 사나이의 희생(?)을 통해 '비만의 발견'을 달성한다.

서구 문학에서 비만의 발견은 더욱 처절하다. 닐 사이먼의 '플라자 스위트'에서 샘은 비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티니 한 잔 마시지 못하면서 이렇게 푸념한다.

"내가 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 분투하고 있는지 알아? 남들은 맛있는 피자파이를 끝없이 먹어치우고 있는데 나는 상추쪼가리나 씹고 있어야 한다구!"

혈색 좋은 풍만한 몸집의 19세기적 인물들은 오늘날의 문학과 드라마 안에서는 날렵한 갈비씨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을 묘사할 때 최대의 호의를 가지고 사용했던 '발그스름하게 살이 오른 뺨' 같은 표현은 비만을 두려워하는 우리 시대에는 거의 모욕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멸종하다시피 한 위대한 뚱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수의 현대 문학은 이 다이어트의 시대를 비웃는 반가운 복음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거대한 체격이 동료들에 대한 책임성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준 타루(카뮈의 '페스트'), 햄릿이 일찍 죽지 않고 그 고뇌를 껴안은 채 중년을 넘겼다면 바로 이 사람처럼 되었을 위대한 변비 환자 호프만(레온 드 빈터의 '호프만의 허기'), 그리고 호리호리한 남자라는 편협한 미적 기준을 의도적으로 비웃기 위해 창조된 인기 짱의 뚱보 프로페인(토마스 핀천의 '브이')이 그런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은 비만의 거구들이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미적 기준을 창조하려 한다.

이 작품들은 말하는 듯하다. 몸을 굶기며 고문하는 가련한 자들이여! 문학은 그대들의 '자연스러운 몸'이 아니라 사람들의 '부자연스러운 시선'을 바꾸겠노라.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가면 사그라들 듯 자연의 일부인 몸도 자연이 시키는 대로 적절히 먹고 적당히 부풀어오르며, 지구상의 아름다운 나날들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가!

서병욱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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