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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개헌안, 1노2김 합의 전에 전두환이 첨삭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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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호 08면

30년 전 민정당 개헌 문건 단독 입수

전두환 대통령이 1987년 7월 10일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떠나며 당원들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오른쪽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 [중앙포토]

전두환 대통령이 1987년 7월 10일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떠나며 당원들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오른쪽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 [중앙포토]

1987년 헌법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그해 민주화 운동과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있었다. 여야(민정당·민주당) 사이엔 그러나 100여 개가 넘는 쟁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양당은 8인 정치회담을 통해 32일 만에 합의안을 만들어냈다.

현경대 전 의원 국회 기증 자료 보니 #당 총재 노태우는 선거에만 온 신경 #전문에 5·18 제외, 선거연령 20세로 #법관추천회의 거부·헌법재판소 신설 #대통령 국회해산권 폐지는 받아들여 #여야 쟁점 8인 회담서 32일 만에 합의 #“양보와 수용, 개헌 과정서 시사점”

중앙SUNDAY가 당시 민정당 쪽 개헌자료를 입수했다. 국회 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장이자 민정당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간사로 개헌 전반을 조율한 현경대 전 의원이 국회도서관에 기증한 민정당의 9차 개헌 관련 자료 47건 338점(3500장 분량)이다. 이를 분석한 결과 노태우 총재가 아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개헌 과정에 깊숙하게 간여한 사실이 확인됐다. 전 대통령은 특히 헌법재판소 설치를 지시하기도 했다.

그동안 87 헌법은 노태우 총재와 민주당 김영삼(YS) 총재와 김대중(DJ) 고문의 ‘1노2김의 합의’로 알려졌다. 정치회담의 8인도 민정당 4명(권익현·윤길중·최영철·이한동), 민주당의 YS계 2명(박용만·김동영), DJ계 2명(이중재·이용희)으로 구성됐었다.

실제로는 노태우 총재가 아닌 전 대통령이 여권의 막후 조율자였다. 현 전 의원은 이와 관련, “김윤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전 대통령이 총재직은 내놨지만 보고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얼마 뒤 청남대(대통령 별장) 응접실에서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전했다. 8인 회담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7월 24일 이뤄진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보고’였다. 현 전 의원은 “2시간 여 보고 중간 중간에 전 대통령이 말을 끊고 여러 말씀을 했다”며 “노태우 총재는 6·29 선언 후 선거를 어떻게 치르느냐에 온통 신경이 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후 민정당의 입장이 정해졌다. 결국 87 헌법은 ‘1전2김’의 타협 산물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전 대통령이 집중적으로 거론한 대목과 이후 논의 과정을 살펴본다.

현경대 전 의원

현경대 전 의원

①헌법 전문에 담을 역사는 어디까지=주요 역사적 사건을 어디까지 포함할지 쟁점이었다. ‘상해임시정부의 법통 및 4·19 이념만 명시’한다는 민정당의 입장과  ‘5·18 등을 추가’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전 대통령은 민정당 입장을 지지했다. 이후 8인 정치회담 조문별 주요 협의에서 5.·18 문제는 ‘잠시 거론되었으나 추후 논의키로 한다’(8월 3일 2차 협상 기록문건)며 중단됐고 결국 5·18은 헌법 전문에 반영되지 않았다.

②18세 대 20세=당시 선거연령은 20세였다. 민정당은 현행 유지를 주장했고 민주당은 만 18세로 낮춰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 대통령에겐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만 18세, 일본은 만 20세”라고 보고됐다. 전 대통령은 “일본이 옳다”고 판단했다. 당시 20세 이상의 유권자는 2531만 명, 18세에서 20세 미만 유권자는 177만 명이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해 말 대선을 앞두고 야권 지지 성향이 강한 100만 표 이상을 집권여당이 받아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판 민주당이 18세로의 인하 요구를 철회하는 대신 선거연령을 법률로 정하는 타협안이 마련됐다. 실제 선거연령이 19세로 인하된 건 2005년이다.

③국정감·조사권=민정당은 ▶출석의원 과반 찬성으로 국정조사 ▶재적의원 3분의 1의 찬성으로 국정조사 ▶국정감사 세 가지 안을 검토했다. 전 대통령은 3안인 국정감사를 택했다. 현경대 전 의원은 “대통령은 ‘국정감사를 하는 걸 보면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행패를 부리는데 왜 이게 필요하냐’고 했다. 내가 ‘유신헌법 때 폐지된 국정감사 부활이 민주화의 표상으로 국민의 뇌리에 박혀 있다’고 설득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도 쟁점이었다. 민주당은 “국회해산권이 의원내각제에서 내각불신임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정된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제에선 국정 최고책임자에 대한 방파제 역할만 한다”며 폐지를 요구했다. 전 대통령은 반대했으나 민정당이 막판에 요구를 받아들였다.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④대통령 임기 논란=민정당은 6년 단임제를, 민주당은 4년 중임제를 놓고 격돌했다. 전 대통령 보고 문건에선 대통령 임기에 대한 지시 사항은 기록돼 있지 않았다. 현 전 의원은 “대통령 원래 뜻이 6년 단임이란 게 명확했기 때문에 얘기할 게 없었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평소 “중임제를 하게 되면 대통령이 당선된 날부터 선거운동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야 대치 국면에서 먼저 양보한 건 YS였다. 5년 단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자 시끄러워진 건 민주당 내부였다. YS와 DJ의 양자 회동이 이어졌고 결국 DJ도 동의했다. 이중재 전 의원은 생전 인터뷰에서 “4년 중임제가 맞지만 YS·DJ는 8년 임기로 이어질지 모르는 제도에 의해 상대방이 당선되는 걸 꺼렸다”고 설명했다.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1987년 7월 24일 청남대에서 머물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현경대 전 의원이 보고한 ‘헌법개정요강안 주요 쟁점 검토 보고’ 문건. 문건의 손글씨는 현 전 의원의 것으로, 보고 당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사진 국회도서관]

⑤헌법재판소는 전두환 아이디어=민주당은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으로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하도록 하는 안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얻어 임명하는 기존 헌법안을 지지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당연직 위원으로 구성되는 법관추천회의를 통해 대법원장을 임명하게 되면 고위 법관들이 결국 이들의 눈치를 보게 될 것 아니냐.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내부 이해관계자들로부터 독립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에서였다고 한다.

전 대통령은 또 헌법재판소 건립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현 전 의원은 “전 대통령은 ‘위헌 정당 해산 결정을 대법원이 하게 되면 운동권 학생들이 대법원 앞에서 화염병 던지면서 데모할 거 아니냐. 대법원을 정치 문제에 휘말려 들게 하면 안 된다’며 별도 조직인 헌법재판소를 검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당시 민정당과 민주당은 대법원이 위헌 정당 해산심판을 맡고 탄핵심판권은 별도 탄핵심판위원회를 두어 운영하자는 쪽으로 논의했었다.

최종적으로 민정당은 헌법재판소 설립과 대통령의 대법원장 임명 제청권을 관철했다. 대신 그전까지 반대했던 민주당의 헌법소원제를 받아들였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같은 개헌 과정에 대해 “당시 양당이 각자의 요구안에 대해 양보와 수용을 통해 합의점을 찾은 과정은 현재 9차 개헌 작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했다.

안기부의 YS·DJ 분열 예측

국가안전기획부는 그 무렵 민정당에 8쪽 분량의 ‘당 개헌안 요강 검토 의견’(대외비) 문건을 보냈다. 현 전 의원은 “당시 안기부에서 시국 상황을 고려해 참고 자료를 보내온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안기부는 당시 이미 YS·DJ의 분열을 예측했다. 안기부는 5공 헌법상 대통령 후보의 정당 등에 의한 추천 조항 삭제에 반대하며 “(삭제하면) 오히려 DJ에게 민주당 입당이나 신당 창당 없이 지역적 바람을 일으키면서 출마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는 것으로서 선거 전략상 대단히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양 김은 서로 출마 의사를 굽히지 않는 가운데 표 대결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온 바 만약 단일 후보조절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DJ의 신당 창당과 그 과정에서의 내분·추태가 필연적인바 이는 여당에 매우 유리한 소재로 작용할 것임에도 여당 스스로 정당 추천 요건을 삭제하려는 것은 선거 전략상 문제가 있다”고 했다. 정당 추천을 유지해야 한다는 안기부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박성훈 기자 park.seong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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