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북한동반 불필요" 암시|방문외교로 본 북한-중공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북한과 중공의 진로가 최근 갈림길에 이른 조짐을 보이고 있다.
78년 중공에서 개혁체제가 출범하면서 교조주의적 혁명이론을 고수하는 북한과의 사이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고 이 같은 긴장해소를 위해 양국은 고위지도급인사의 상호방문을 이용했다.
그러한 예로서 두 나라의 총리가 취임하면 첫 번째로 상대국을 방문해 온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중공은 최근「리펑」(이붕)총리의 취임 후 첫 해외방문 국을 파키스탄(10월)으로 정함으로써 이 같은 외교적 관례를 깨 버렸다.
지난해 9월 북한은 총리로 취임한 이근모를 곧 북경으로 보내『쌍방관계는 피로써 맺어진 혁명적 전우이며 계급적 형제』라고 하여 북한의 전통적인 대 중공 우호자세를 반복했다.
그러나 당시「자오쯔양」(조자양)총리는 이에게『13전 대회가 막 폐막된 시점에 방 중한 것은 양국간의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중공 당 13전 대회가 내 외신 기자 4백 여명을 불러들여 대회의 진행과정을「투명」하게 보여주면서 개방·개혁의 실적을 과시했던 대회고 보면 조의 발언은 이에게 원칙적인 말을 되풀이하기보다 직접 보고 들은 대로 판단에 맡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가 북경에 도착한 그날 「후치리」(호계립)(당시 정치 국 상무위원)는 『북한측이 동의할 경우』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한국과의 직접무역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하여 중공의 진로를 암시하고 있다.
또 최근 북한의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북경을 방문한 동안 중공관영 경제일보가 한국과의 직 교역을 주장하고 나선 것도 북한이 중공을 찾은 목적에 대해 중공이 딴전을 부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돌이켜 보면 방문외교를 통해 속사정을 먼저 털어놓던 독은 중공이었다. 개혁체제의 등장 초기 지도부의 권력구조개편과 실용주의 노선에 대한 북한의 이해를 구할 필요에서 78년 5월「화궈펑」(화국봉), 79년 9월「덩샤오핑」(등소평, 81년 말 조자양 등 중공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평양을 줄지어 찾았었다.
이때만 해도 조자양의 표현대로「친척끼리의 왕래처럼 북·중 관계는 돈독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82년 9월 김일성이 북경으로 찾아 나선 것은 그렇게 우호적이었던 것으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김의 북경방문이 베트남 붕괴직후인 75년4월이래 7년 반만의 일이라는 점에서도 그만큼 큰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군사적으로는 대남 우위를 유지해야 하는 한편 김정일에의 후계문제를 안고 있는 만큼 중공의 지지는 북한에 사활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북한은 중공의 기대에 얼마간이라도 부응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서방으로부터의 자본·기술도입을 위해 합영법을 설정하기로 하고 최근에는 신의주를 중공에 개방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 서방 개방에는 남-북 관계가 있고 더구나 개방·개혁을 할 경우 자체의 통제력이 유지될 수 있느냐의 위험이 뒤따르게 된다. 북한으로서는 진퇴양난이랄 수밖에 없다.
김일성의 잇단 공식·비공식 방중은 이런 배경과 관련된다. 중공은 다시 2년 만인 84년 당시 김일성의 방중을「내부적인 비공식 방문」이라고 그 위신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이례적인 규정을 했다. 김이 또 다시 방중 길에 나설 때 북한측은 이번에는「공식방문」으로 아예 못박아 주문하였다.
그러나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40여 시간을 달려간 김에게 등소평은『심천 특구에 가보라. 얼마 전까지도 가난했던 시골이 굉장한 수출기지로 바뀌었다』는 말로 작별을 대신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북한과 중공이 그들의 표면적인 현안들보다 그 저변에 있는 개혁과 반 개혁의 깊게 갠 골을 메우지 못하고 있음을 설명해 준다.
더구나 최근 등소평은 북한에 짜증 섞인 충고까지 던지고 있다.『우리는 조선동지와의 관계를 중시해야 하지만 중대한 원칙문제에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한국전쟁이 끝난지도 30여 년이 지났다.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을 때가 아니다』는 비공식석상의 발언에는 중공 측의 결단의 의지까지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중공의 입장이 이붕의 총리취임 후 첫 공식해외방문이「북한이 아닌 곳」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는 관례를 깨는 것과 북한방문 자체를 무기 연기시킨 양면포석으로 보인다.
개혁노선을 지지하는 테크너크랫 세력과 종래의 무력적인 통일노선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는 북한내부에 대해 중공은「전통적 관계」를 준수함으로써 강경 세력을 지원하기보다 온건한 실무세력이 부상할 수 있도록 영향력 행사와 시간 벌기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공은 이제 북한이 동반하지 않아도 자신의 진로를 계속 나아갈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전택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