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김진만 집사람 유치원까지 "헌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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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칼로 정권잡아 돈을 번게 권력형 부정축재지 사업가인 내가 정치를 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한때 집권 공화당의 정치자금을 요리하며 정·재계를 주름잡았던 김진만전국회부의장의 제일성이다.
같은 돈이라도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부정축재」와 인연이 많다. 권력을 이용해 부정축재를 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자유당의원이었던 그는 4·19및 5·16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다.
또 민주당 단명정권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을 집권 여당내에서 정경을 잇는 핵심적 역할을 했고 그에따른 잡음 속에 때로는 숙청 대상자로 거명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김씨는「권력형」「부정축재」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사업하던 사람이므로 자신의 재산은 갑자기 정권을 잡은 군인이나「일반」정치인이 축재한 것과는 구별돼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일거에「횡재」한 인사들의 재산과 자신의 그것을 같은 맥락에서 판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때문에 김씨는 자신과 자손들의 명예를 위해 80년의 환수조치 원인무효소송을 준비중이라고 밝히고 5·16직후 재판을 청구, 재산을 찾기 위한 투쟁을 벌인 것도 명예때문이었다고 강조한다.
두차례의 군사정권 태동기에 두차례 모두 부정축재자로 지목돼야했던 김씨의 파란만장한 역정은 54년 자유당소속 민의원 (삼척)이 되면서 시작된다.
삼척금융조합등에서 근무하다 자유당 소속으로 3대 민의원의원이 된 김씨는 빠른 두뇌 회전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십분 발휘, 초선으로 국회 상공위원장이 됐다.「대사」(그의 별명) 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점이다.
이때 김씨는 정부 귀속 기업이었던 북삼화학을 불하방아 회장이 됐다. 이「북삼」은 80년 계엄사가『정치적 압력을 가해 특혜로 불하받았다』고 비난한 것.
그는 4대에 연속당선됐으나 4·19이후 들어선 민주당정권이 반민주 행위자 처벌과 부정축재 처리문제를 2대과업으로 추진하면서 서리를 맞았다.
아직 부정축재 처리가 미제인 상태에서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국가 자주경제 재건을 혁명과업으로 들고나오며 이의 처리를 서둘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축재「기업주」와「공직자」로 나누어 조사에 착수, 27개 기업주로부터 5백여억환을 환수조치했다.
또 전직장관 4명, 전직의원 13명, 예비역 군인7명, 판사 1명, 기타 공무원 7명, 국영기업체 간부2명 등 34명의 부정축재 공무원으로부터 80여억환을 환수하는 한편 곽영주경무관등 19명은 혁명검찰부에 고발했다. 이당시 김씨는 23억환의 이기붕국회의장 다음으로 많은 12억5천만환의 환수통고를 받았다.
김씨에게는 당초 3억7천여만환의 환수통고가 있었으나 부정축재처리법 개정에 따라 액수가 대폭 늘어났고 그 자신은 부정 공무원에서 부정 이득자로 전환, 처리되는등 이래저래 세간의 시선을 모았으나 이의를 신청, 본인의 표현처럼 명예를 회복했다.
제3공화국의 모체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철퇴를 맞은 김씨는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민정이양과 함께 공화당에 참여, 6대의원에 당선된 후 10대까지 7선의 관록을 쌓았다.
경제개발이니 하며 한창 경기가 좋던 시절 집권여당의 원내총무·재정위원장·국회 부의장으로 정·재계를 종횡무진 누볐다.
「대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능글능글하며 JP에 대걱하는 4인체제의 1인으로 정치판에서도 확고한 자리를 굳혔고 김성곤씨와 더불어 재계와의 창구가 되어 풍성한 정치자금을 요리해냈다.
동시에 자신의 기업영역도 넓혀갔다. 우풍화학·강원여객·춘천문화방송등이 그것.
그의 이러한 활동은 정경유착의 대명사로 불렸고 집권세력이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어려울 때엔 대국민 충격요법을 위한 희생물로 오르내렸다. 숙청대상 또는 공천탈락등의 형태로….
강창성전보안사령관은『71년 대통령선거의 승리틀 위해서는 국민에게 지탄받는 부정부패자를 척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방안이 나왔었다』며『박종규대통령경호실장·이후락주일대사·김진만원내총무·김형욱중앙정보부장 (3선 개헌직후 해임)등 5명의 거물이 그들』이라고 최근 밝힌바 있다. 강씨는 이같은 선거대책실무회의의 구상을 박정희대통령에게 건의했으나『시간을 두고 연구해보자』는 답변을 들었을뿐이라고 했다.
이때 거명된 인사들 (김형욱은 해외에서 피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을 박대통령 사후 정풍파의원들이 다시금 지목한 것으로 김씨등은 신군부가 이들을 부추겨 꾸민짓이라고 확신한다.
『박대통령이 만나자고 하더군요. 최석림의원과 청와대로 갔더니「혁명때 몇가지 실수를 했는데 김의원을 잡아넣고 재산을 뺏으려던게 그중 하나」라며「깊이 사과한다」고 말합디다. 이게 공화당에 들어간 계기입니다.』김씨는 재판으로 명예를 되찾았기에 새 정권에서 자기를 영입했던 것임을 극구 역설했다.『박대통령이 믿거니 하고 원내총무도 시키고 해서 열심히 일했읍니다. 나보고 재산이 많다 어떻다 하는데 나는 본래 사업하던 사람입니다.「군인」이던 사람이 재단을 만든 것과 내것을 같이 얘기하면 곤란합니다. 춘천MBC니, 강원일보니 하는데 아무도 못하겠다고 해서 내가 떠맡은겁니다. 하나밖에 없는 출신 지방 신문사를 살려야 하겠기에 말입니다. 강원여객도 도산할 지경에 이른 것을 맡은거지요. 경기가 좋아지니까 괜찮아졌읍니다만….』
김씨는 당재정위원장 시절에 부동산이건, 예금이건 늘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며 계엄사 조사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말많던 재정위원장을 하면서 오해가 없도록 공화당사무국직원 황의녹씨를 데려다 놓고 모금 리스트를 일일이 작성토록 했읍니다. 이때의 서류는 몽땅 땅밑에 파묻어 보관했지요. 계엄사 수사관들에게 가져다 대조해보도록 했읍니다.』
김씨는 이틀씩 잠을 안재우고 자기의 측근들을 옆방에 데려다 두들겨 패기에 더이상 감출 것도 없고 해서 다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꾸 액수만 높이려고 들어요. 정치자금 리스트를 확인하고 나더니 아무개 장관한테서 돈을 받지 않았느냐고 추궁합디다.「내가 사업 깨나 하는 사람인데 주면 줬지 왜 받겠느냐」고 했읍니다. 조사해보라고 하니까 알았다고만 하더군요. 수사관에게「하고싶어 하는일이 아닌줄은 안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각본대로 만들게 뻔하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 다 해주겠다」며 재산목록을 써주었읍니다. 어차피 예정대로 될덴데 공연히 사람들만 다치게 할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재단까지 내놓으라는거예요. 또 집사람에게 사준 유치원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집사람은 이를 피해 40여일간이나 도망다녔지만 나를 안내보낸다니까 어절수 없이 도장을 찍어줬다지요….』
김씨는 자신의 육영사업 (동곡문화재단) 까지 뺏으려들기에『이래서는 안된다』며 버텼다고 했다. 그러면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더니『그래봐야 신문에 한줄도 안나간다. 아들의 사업 (동부그룹)까지 못하게 될뿐』이라고 으름장을 놓더라고 했다.
『하라는대로 재단이사장 사표도 쓰고 판사 앞으로 보내는 재산기증서류에 도장도 찍어줬읍니다.』
김씨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으나 이번에 둘째아들 (김댁기씨) 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강원 태백시) 가 떨어지는 것을 보니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상대방 후보가 80년당시「부정축재자」운운한 신문을 복사해 집집마다 돌리며 매도하는 바람에 아들이 낙선하게된 상황을 목적한 이상 그냥 지나칠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가져간 재산(기업체등 1백3억원)을 잘 쓰고 깨끗이(정치를) 해나갔으면 달리 생각할수도 있겠읍니다만 그렇지도 않고 무엇보다 자식들이 부정축재자의 아들로 낙인찍혀 고통받는 것은 참을수 없읍니다.』
김씨는 정풍파의원들의 비난과 관련,『10대때는 무소속으로 당선됐어요. 그런데 정보부에서 동경까지 따라와 각하의 분부라며 입당하라고 했읍니다. 나 자신 공화당에서 커나온 사람이고해서 입당했더니 얼마 안가 야단을 떨더군요. 정치도의도 도의려니와 우리를 크게 욕해 저들의 주가를 올리려 한것이니 어쩌겠읍니까』하고 당할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김씨는 도장을 쩍어주고나서 자신의 生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썼지만 아직 생존자가 많아 밝힐 단계는 아니라고 했다.
『나자신 박대통령과 가깝다고 다쳤읍니다만 그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군인이라서 의회정치는 잘못했지만….』
옛날을 회고하던 김씨는 보안사분실을 나올때「안내」하던 H소령이 환수된 회사중 꼭 갖고 싶은게 있으면 돌려줄테니 말하라고 하기에 신문에 다 났고 갖고 싶지도 않아『또 뺏어가려고 그러느냐』고만 대꾸해줬다고 했다. 그저 앞으로의 소일을 생각해 손에 익은 골프채를 하나 받아넣었을 뿐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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