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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만에 중국 공장 철수···부산 돌아온 신발회사,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2년 만에 중국 공장을 철수하고 부산에 돌아온 트렉스타가 자체 브랜드 신발 생산에 한창이다. 이은지 기자

22년 만에 중국 공장을 철수하고 부산에 돌아온 트렉스타가 자체 브랜드 신발 생산에 한창이다. 이은지 기자

“신발 가격은 요지부동인데 중국 인건비가 4배로 올랐어요. 국내 공장에 로봇을 투입해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 지난해 중국에서 철수했죠.”

트렉스타 학산 등 중국 공장 접고 '귀국' #자동화하고 품질 높이면 국내서도 승산

지난 12일 찾은 부산 강서구 녹산산업단지의 ‘트렉스타’ 부품공장에는 스마트 자동화 시설 설치작업이 한창이었다. 오는 6월부터 로봇 6대가 투입되면 근로자 45명이 생산하던 하루 1200켤레를 8명이 감당할 수 있다. 자동화 시설 설비에는 정부 지원금 40억원이 투입됐다.

트렉스타가 낮은 인건비를 찾아 중국 톈진으로 떠났던 1996년 중국인 1인당 월급은 20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부터 임금이 급격하게 오르더니 2016년 900달러까지 치솟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종 세제 감면 혜택이 줄어들고 직원 복지 혜택과 규제가 늘어나면서 수익성이 나빠졌다. 5000명이던 직원을 1000명으로 줄여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트렉스타 박성원(57) 상무이사는 “중국을 큰 시장으로 보고 진출하는 해외기업이 많지만, 자국 기업에 우선권을 주기 때문에 해외 기업이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은 좁다”며 “부채를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하는 해외 기업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트렉스타 박성원 상무이사(맨 오른쪽)가 직원과 함께 오는 6월 가동되는 신발 자동화 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트렉스타 박성원 상무이사(맨 오른쪽)가 직원과 함께 오는 6월 가동되는 신발 자동화 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해외로 떠났던 신발업체들이 부산에 속속 돌아오고 있다. 수십 개의 신발 부품·제조업체가 밀집해 있는 녹산산단은 공장의 기계 소리에 활기가 넘치고 있다. ‘부산 신발 부흥’의 고동 소리다.

㈜학산 역시 2016년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내년 초 녹산산단 내 신발산업 집적화 단지에 공장을 새롭게 짓는다. 중국 공장에서 주문자 제작생산(OEM)으로 아디다스·뉴발란스· 데상트를 생산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다.

대신 국내 공장에서 자체 브랜드 ‘비트로’를 생산해 동남아 시장을 공략할 예정이다. 학산 이동영(35) 대표는 “국내에서 생산하면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고, 품질과 재고 관리가 쉽다”며 “지금도 비트로 테니스화는 나이키·아디다스 못지않게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기술력만 있으면 유명 브랜드와 대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부산 강서구 녹산산단에 있는 학산 공장에서 자체 브랜드 '비트로' 생산이 한창이다. 이은지 기자

부산 강서구 녹산산단에 있는 학산 공장에서 자체 브랜드 '비트로' 생산이 한창이다. 이은지 기자

㈜나노텍 세라믹스는 2000년 창업 때부터 국내에 공장을 차렸다. 똑같은 슬리퍼 한 켤레를 생산할 때 베트남은 4달러, 국내에선 18달러가 들지만, 특수기능이 있으면 소비자가 찾는다는 신념에서다. 나노텍 세라믹스는 2009년 신발 바닥에 세라믹 분말을 분사해 경사진 바위 위에서 ‘절대’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 개발에 성공했다. 중국산 제품과 비교해 10배 정도 비싸지만, 물량이 달릴 정도로 인기다. 하루 1600켤레를 생산해도 주문량을 따라갈 수 없어 최근 현 공장 옆에 공장 증설에 착수했다. 2005년 15억원 수준이던 매출은 2017년 100억원으로 뛰었다. 기술 개발에 매년 매출의 7%를 투자하고 있다.

나노텍 세라믹스 정상옥(55) 대표는 “한국 신발산업이 쇠락했던 이유는 유통업체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OEM 제조만 했기 때문”이라며 “‘안전하고 땀이 차지 않는 신발’처럼 특수기능을 가진, 스토리가 있는 자체 브랜드를 생산해야 해외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부가가치를 높인 신발이 틈새시장을 파고들면서 경제 지표도 좋아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신발 제조업 출하액은 2006년 1조7000억원에서 2016년 2조4470억원으로 44% 증가했다. 10인 이상 신발업체 493개 가운데 230개가 몰려있는 부산은 같은 기간 5410억원에서 9130억원으로 69% 늘었다. 국내 신발산업의 부가가치는 같은 기간 전국의 경우 45%(7420억원→1조770억원), 부산은 64%(1880억원→3080억원) 증가했다.

나노텍 세라믹스 정상옥 대표가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신발 강도 실험장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나노텍 세라믹스 정상옥 대표가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신발 강도 실험장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부산시는 15억6000만원을 들여오는 오는 9월 신발 기능을 실험하는 테스트베드를 만든다. 또 올해부터 2022년까지 230억원을 투입해 로봇 등 4차산업 기술이 접목된 ‘지능형 신발공장’을 구축한다. 아디다스의 스피드 팩토리(Speed Factory)처럼 로봇이 최대 7일 만에 재봉부터 완제품 생산까지 담당토록 할 방침이다.

하지만 학산 이 대표는 “신발 트렌드가 매년 바뀌고 있어 5년 뒤를 내다보면 구식이 될 수 있다”며 “신발 지능형 공장을 빨리 구축해 속도감 있게 트렌드에 대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유통망이 없는 영세한 신발업체를 위해 공동 브랜드를 개발해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1998년 신발업체의 공동브랜드 ‘테즈락’은 실패했지만, 특수 기능의 신발개발에 성공하면 승산이 있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나노텍 세라믹스 정 대표는 “선진국일수록 워킹화·등산화·운동화처럼 신발 종류가 다양해지고 기술력이 강조된다”며 “국내에 유턴한 기업이 높은 인건비에 살아남을 수 있게 기술 개발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인프라 조성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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