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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심판받은 '색깔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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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저녁 10시가 넘어서부터 각종 뉴스 사이트와 TV에선 이타르-타스 등 러시아 통신사들의 속보를 인용한 자막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우크라이나의 선거 결과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투표 전부터 이미 현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의 정적이자 친러파 정치인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의 압승은 충분히 예상됐다. 하지만 투표가 마감되고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리드하는 것이 명확해지자 러시아 정치 분석가들의 움직임이 바빠진 것이다. TV에 출연한 일부 분석가는 벌써부터 14개월 전 옛 소련권 국가들을 휩쓸었던 오렌지 혁명 등 '색깔 혁명'의 종언과 회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전망마저 내놓았다.

우크라이나 선거 전에 있었던 벨로루시 대통령 선거도 이들의 이러한 전망에 힘을 실어 주었다. 미국과 서방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항의시위를 하는 시위대에 초점을 맞추지만, 러시아 언론들은 그들이 한 줌 세력밖에 안 되며 오늘(26일)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가 얼마나 조용하고 평온한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보도 경향은 최근 러시아가 보여 주는 권위주의로의 회귀, 과거 공산주의 시절 이들 지역을 장악했던 소련의 파워에 대한 향수 등으로 쉽게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이 자유주의자이건 사회주의자이건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역사와 지역.문화적 자양분과 경험을 공유한 옛 소련권 지역에서 의도적으로 주민들의 정서에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그들의 노선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정서와 분위기를 애써 외면하고 오로지 정치적 자유의 확대라는 데 초점을 맞추었던 서방 언론의 보도가 더 현실 왜곡적이라고 본다. 경쟁심과 함께 분노와 실망도 느껴진다.

키예프 루시를 제외하고 존재할 수 없는 러시아의 역사와 도네츠크 탄전을 비롯한 동부 러시아 개척에 보여준 러시아인들의 노력, 크림전쟁 등을 통해 얻은 크림 및 흑해연안 지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애착이 상징하듯 옛 소련권 지역에 존재하는 러시아어 사용 인구와 슬라브족 역사의 공통성, 역사성 등을 감안하면 이들의 태도는 일부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가 관심을 가졌던 오렌지 혁명 등 색깔혁명의 본질은 정치권력을 누가 갖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를 시발로 그루지야.키르기스스탄 등으로 이어졌던 색깔혁명의 본질은, 권력은 결국 국민에게서 나오며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는 국민으로부터 배척당한다는 평범한 민주정치의 관행을 일깨운 것이었다. 공산정권의 몰락과 그 이후 이름만 바꾼 채 공산주의 시절과 똑같이 주민을 무시해 온 독재부패정권이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이 바로 색깔혁명의 본질이었다.

이 때문에 오렌지 혁명의 주역이었던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과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가 권력다툼으로 분열하고, 그 결과 야누코비치가 다시 정치 전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현상적 변화는 그것이 민주적 선거와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오렌지 혁명의 종언을 의미한다고만 볼 수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옛 소련권은 이미 새로운 제2의 정치혁명기에 돌입했다. 이제 정당과 지도자들은 '큰 목소리'와 광장에서의 '열렬한 박수'만이 아닌 '박수 뒤에 숨은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구체적인 정책을 놓고 경쟁을 해야 함을 이번 우크라이나 총선은 보여주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김석환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