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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난 대안' 된 대만 대체복무제…천신민 전 대법관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시력이 나빠 군에서 사격 훈련을 받지 못했다. '못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방문 교수로 영국에 머물며 유럽의 대체복무제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1년간의 연구 끝에 보고서를 냈지만 '가장 공평한 두 가지는 대학입시와 병역제도'라 생각하는 대만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수년 동안 국회의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의원들이 국방부를 납득시켰다. 2000년 대만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게 한 산파(産婆)로 불리는 천신민(陳新民) 전 사법원 대법관 이야기다.

한국헌법학회(회장 고문현) 초청으로 방한해 서울변호사회 주최로 열린 대체복무제 관련 강연을 한 천 전 대법관을 9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천신민 전 대만 대법관이 9일 오전 순화동 본사에서 대체복무제 도입과 관련해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상조 기자

천신민 전 대만 대법관이 9일 오전 순화동 본사에서 대체복무제 도입과 관련해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상조 기자

도입 19년 차를 맞은 대만의 대체복무제는 이제 경찰·소방·환경보호·의료·교육·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제도가 됐지만,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국회에서 대체복무제 도입을 앞두고 공청회를 열었을 때 기자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초기에는 대체복무자들을 '겁쟁이'나 '2등 병역자'로 보는 시선도 따가웠다고 한다.

하지만 군대처럼 엄격한 규율을 만들고 제복·훈장 등을 통해 소속감과 명예감을 높이도록 했고 지금은 취업난이 심각하다 보니 의무복무 기간이 끝난 후에도 대체복무기간을 연장하는 청년들도 있다고 한다.

천 전 대법관은 대체복무제를 ‘희망의 병역제’라 부른다. 병역을 수행하는 용기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회복무도 국가에 같은 공헌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천 전 대법관은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한 공로를 인정받아 '1등역정포장'을 받기도 했다. 다음은 천 전 대법관과의 일문일답.

대만에서 대체복무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종교적 이유로 선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꼭 종교적 사유가 있지 않아도, 군 복무를 하고 싶지 않은 자는 누구나 대체복무를 신청할 수 있다. 다만 기간은 차이가 있다. 종교적 사유가 있거나 신체등급 판정을 받은 경우에는 일반현역과 같은 2년간 복무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2년 6개월 정도 근무한다. 
누구나 대체복무를 할 수 있다면 현역으로 군에 갈 사람은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대체복무역은 매년 정원이 정해져 있다. 현재 연 2만명 정도가 대체복무를 수행하는데, 이는 징집대상자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현역으로 가려면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갈 수 있는데, 대체복무로 가려면 종교적 사유나 신체등급 판정을 받지 않는 이상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또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면서 군부대도 많이 개선됐다. 합리성은 높아졌고 상관의 권력남용은 줄었다. 현역으로 가더라도 대체복무와 업무 강도가 큰 차이가 나지 않게 됐다.
군 복무를 한 적이 있는가.
대학에 합격한 후 훈련소에서 2달간 훈련을 받고 4년 대학생활 후 시험을 봐 군법관(한국의 군 법무관)으로 1년 4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다. 훈련소에 있을 때는 학대, 권력 남용 등 현상을 보고 문제를 느꼈다. 군법관으로 일하기 전에도 훈련을 받았는데, 시력이 좋지 않아 사격 훈련을 면제받았다. 그때 '나는 눈이 좋지 않지만 다른 일을 잘 할수 있다. 각자 못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과 대만의 상황은 다르지 않은가. 한국은 저출산으로 입영가능인력이 줄고 있고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다.
저는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도 대체복무제를 충분히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저출산 문제도 심각하지만, 대만 저출산 문제는 세계 1위다. 그리고 현대전은 더이상 인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무기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4~5명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이제 1명만 있어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오히려 의료 등 뒤에서 서포트하는 인원이 더 중요해졌고, 그래서 대체복무가 더 필요하다.
대체복무자들을 '겁쟁이'나 '2등 병역자'로 보는 시각은 어떻게 줄어들었나.
유럽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저는 대체복무자들이 제복을 입고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대 계급장처럼 완장도 만들고, 훈장이나 포상을 주는 제도도 만들었다. 엄격한 규율과 관리는 군대와 비슷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체복무를 하는 사람 스스로 어떤 팀에 소속돼 있다는 명예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대체복무자들도 최전방에서 일하는 군인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요즘은 대만 사회 내에서 대체복무자들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
더이상 대체복무자들을 비하하는 현상은 없다. 부유층에서도 자제들을 대체복무역에 보내는 것을 당당하게 여기고 선호하고 있다. 청년들 중에서는 취업난이 심각하고 일자리가 부족하다 보니, 대체복무를 연장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현역과 대체복무역의 봉급은 동일하고, 일반 대졸 초봉의 4분의 1 정도인데, 의무복무기간 후 연장하게 되면 사관으로 진급하게 되고 봉급은 일반 대졸 초봉과 비슷해진다. 청년 입장에서는 적당한 월급을 받는 임시 일자리로 활용할 수 있고, 대체복무역을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숙련도가 높은 사람을 계속 쓸 수 있으니 환영하는 일이다.

◆대만 대법관은 한국의 헌법재판관…높은 연금과 강력한 처벌로 '전관예우' 막아

9일 중앙일보를 찾은 천신민 전 대만 대법관. 우상조 기자

9일 중앙일보를 찾은 천신민 전 대만 대법관. 우상조 기자

대법관 임기를 마친 뒤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천 전 대법관에게 '전관예우'에 대해 물었다. 대만에서 1·2·3심을 맡는 직업판사들은 70세까지 임기가 보장된다. 천 전 대법관은 "은퇴 후에도 2심법원(우리의 고등법원) 판사는 차관 대우를, 최고법원(우리의 대법원) 판사는 장관 대우를 받는다. 퇴임 후 받는 연금은 같은 연령의 일반 공무원의 2~3배다. 그렇기 때문에 은퇴 후 변호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관시(關係·연줄이나 인맥을 중시하는 중화 문화권의 관습)'가 활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만의 많은 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명함에 그런 이력을 적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의뢰인 역시 판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 변호사를 선호한다. 하지만 천 전 대법관은 "최근 5년간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판사 출신 변호사가 예전 동료인 판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지만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처벌 받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 천 전 대법관의 설명이다.

"판사는 인정, 감정, 우정을 고려해서는 절대 안 되는 직업이다. 동양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알지만, 철저히 해야 한다." 전관이 된 그가 다시 법정에 서지 않는 이유다.
"대법관 하다가 은퇴하면 물론 변호사로 일할 수 있죠. 저도 변호사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변호사를 하게 되면 법정에 가서 1·2심 맡고 있는 판사들이 다 제 제자들인데…. 업무하는 데 지장도 되고, 우리가 말하는 윤리와 맞지 않습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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