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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마음 못 헤아린 성범죄 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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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권력형 성폭력의 법정 최고형이 현행 징역 5년에서 10년으로 강화된다. 또 공소시효도 현행 7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난다. 8일 정부는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젠더 폭력을 발본색원한다는 생각으로 범정부 차원의 수단을 총동원해 주기 바란다”고 지시한 뒤 열흘 만이다. 그 사이 여성가족부·법무부·문화체육관광부·고용노동부 등 12개 부처가 협의회를 구성해 이번 대책을 마련했다.

대통령 지시 열흘 만에 정부 대책 #지위 이용한 성폭력 최대 10년형 #형량 배로 늘려 처벌 강화했지만 #성범죄, 입증 힘들어 불기소 많아 #성폭력 근절 실효성 있을지 의문

대책의 초점은 처벌 강화다. 현재는 징역 5년 이하, 벌금 1500만원 이하로 규정된 업무상 위계·위력 간음죄의 법정형을 징역 10년 이하와 벌금 5000만원 이하로 각각 상향 추진한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여비서 성폭행,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여배우 성폭행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현재는 과태료 처분에 그치는 사업주의 성희롱이나 성희롱 행위자 미징계에 대한 처벌도 벌금 또는 징역형으로 강화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성폭력 범죄를 일으킨 예술가는 정부 보조금 등 공적 지원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협의회 위원장을 맡은 정현백 여가부 장관은 “성희롱·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엄중한 법적 조치를 시행하겠다. 이것이 나라다운 나라가 할 일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대책이 발 빠르게 나오긴 했지만 피해자인 여성의 입장을 세심하게 반영하지 못한 탓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나온다.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운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일벌백계식 처벌 강화만으로는 근절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김재련 변호사는 “성폭력은 증거 확보가 너무 어렵다. 가해자가 부인하면 진실게임 양상으로 가 버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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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업무상 위계·위력’을 입증하기 쉽지 않다. 실제 지난해 연기자 지망생을 성폭행한 드라마 제작사 대표 A씨의 사건은 단순한 ‘비동의 간음’으로 간주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연예계 영향력을 가진 A씨의 행동이 ‘업무상 위력’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업무상’이란 문구의 해석에 다툼의 여지가 많다”고 짚었다.

피해자들의 진술을 어렵게 할 수 있는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서도 정부는 여성단체 일부에서 주장했던 ‘폐지’ 대신 ‘위법성 조각사유(죄가 안 됨) 적극 적용’을 내놓았다.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형법 310조를 활용하라는 것이다.

이날 대책에는 온라인 악성 댓글 처벌 방침이 포함됐다. 민갑룡 경찰청 차장은 “경찰청 사이버수사과가 상시 모니터링해 댓글이 피해자에게 악의적일 경우 작성자의 IP를 추적해 사법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 고용부는 ▶홈페이지에 익명 신고창구를 개설하고 ▶남녀고용평등 업무 전담 근로감독관을 배치해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감독하겠다고 밝혔다. 또 문체부는 12일부터 100일 동안 ‘특별 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처벌 강화 위주로 가다 보니 가해자를 변화시키려는 교육이 부족해 보인다.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는 “예술계 성폭력에서 예술대학·예술고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한 대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지영·이에스더·정종훈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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