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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납북자' 표현 금지와 '민족 공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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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2년 6월 다시 북한에 갔을 때 안내원들의 태도는 12년 전과는 사뭇 달랐다. 남측을 비방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발언은 듣기 어려웠다. "대통령선거에서 누가 이길 것 같으냐"는 등 남측 사정에 대한 궁금증 해소 차원의, 그렇고 그런 질문이 고작이었다. 한 안내원은 시장경제 원리에 대해 묻기도 했다.

물론 방북한 사람마다 경험이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북한이 대결적 자세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말이다. 이산가족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70~80년대 남북 적십자회담 당시 남측이 이 얘기만 꺼내면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제는 수십 차례에 걸친 상봉은 물론 면회소 설치까지 합의한 상태다. 군사 요충지를 뒤로 빼면서까지 합의에 응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변하지 않은' 부분도 많이 남아 있다. 자신들도 군사훈련을 하면서, 남측이 하면 '북침 훈련'이라며 장관급 회담 등 기존 합의사항을 깨버린다. 그런 훈련인지 아닌지 와서 보라는 제의도 거부한다. 서해 북방한계선에 대한 시비도 철회할 의사는 조금도 없다.

최근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벌어진 남북 충돌은 이런 측면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일본 총리에겐 최고통치자가 나서 일본인 납치를 시인, 사과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인은커녕 '납북자'라는 표현도 못쓰 게 한다. 왜 이럴까. 납치를 체제문제의 차원에서 간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 대한 납치 시인이 문제를 풀기는커녕 악화시키고 있는 상황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이 사안에 대해 북한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남북관계가 많이 진전됐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언제든지 파란을 일으킬 복병이 숨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과 남의 일부 계층이 유별나게 '민족 공조'를 강조하고 있다. 마치 남북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그러나 지난해에 이어 두 번이나 '납북자'라는 단어 하나를 놓고도 공조를 못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만큼 남북이 '진정한 화해'의 길로 가기에는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발전한 적이 있었느냐"며 이런 현실에는 애써 눈을 감아왔다. 이번에도 애매모호한 '유감' 표명이 고작이다. 이러니 재발방지 대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우리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면 남북관계에 지장을 준다'고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납북자'라는 표현이 북한을 자극했으니, '지장'을 주지 않으려면 우리 언론이 이런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기모순은 '화해'만 앞세운 단선적인 대북정책의 당연한 귀결이다. 효율적 대북정책은 '화해'란 목표와 함께 '대치'라는 현실을 입체적으로 살필 때만 수립 가능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희창 논설위원

*** 바로잡습니다

3월 27일자 31면 '중앙포럼' 중 '군사요충지를 뒤로 빼면서까지 합의에 응한 개성공단과 금광산 관광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에서 '금광산 관광'은 '금강산 관광'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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