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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가 선대 유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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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김정은이 했다는 말인 “비핵화 목표는 선대의 유훈”을 듣자 떠오는 장면이 있었다.

#1. “우리에겐 재처리 시설이 없단 말이오.” 1991년 김일성이 평양을 방문한 미국 특사에게 한 주장이다. 한국이 ‘중매’한 북·미 대화였다. 당시 북한은 한·소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고립됐고 에너지 부족과 경제난이 겹친 데다 영변 핵시설로 국제사회의 의심도 받았다.

#2. “남북 핵 협정은 위대한 승리다.” 그해 말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 후 김일성이 북한 협상단에 한 칭찬이다. 당시 북한 협상단은 김일성 지시 때문인지 많이 양보했다. 북한 대표였던 김영철이 한국 측에 “협정 문안의 90%가 남한 측 주장에 따라 작성된 것이니만큼 이건 당신네 협정”이라고 투덜댔다.

#3. “있지도 않은 핵 문제를 들먹이고 있다. 정작 비난받아야 할 나라는 한반도에 핵무기를 들여와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을 위협하고 있는 미국이다.” 94년 김일성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언성을 높이며 한 말이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협조해라. 그 후에야 비로소 관계 개선을 논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나서였다. 영변 핵시설에 대한 북한의 잇따른 거짓말에 미국이 대북 군사옵션을 심각하게 검토하던 중이었다.

미국 최고의 남북한 전문가로 불린 돈 오버도퍼가 『두 개의 한국』에 담은 내용이다. 이렇듯 북한의 궤적을 보면 ‘비핵화 목표는 선대의 유훈’이란 말의 뜻은 비핵화 자체에 있다기보다 ‘비핵화를 하겠다고 말하고 그에 따른 보상은 챙기되 핵 개발은 지속하는 것’에 가깝다. 90년대 북핵 위기 이후 일관된 흐름이다. 오죽하면 북핵 협상을 오래 지켜본 이용준 전 외교부 차관보가 2010년 “과거 우리나라의 어느 정부는 북한 핵 문제를 남의 문제인 양 모르는 체하기도 했고 어느 정부는 북핵 문제가 마치 다 해결이라도 된 듯이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북핵 문제는 단 한 번도 해결되거나 해결의 문턱에 접근한 적이 없었고 단 한순간도 상황이 호전됨이 없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을 뿐”(『게임의 종말』)이라고 토로할 정도다.

북한이 달라졌을까. “핵 무력이 완성됐다”는 마당인데 순진한 기대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6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전하자 당장 “(북한의) 거짓말”(조너선 크리스톨 미국 전문가)이란 반응이 나온 배경이다. “아직 낙관할 수 없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이 현실적이다. 그래야 한다.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