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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자 44% 강간으로 인정 못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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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국의 강간죄 처벌 기준이 영국·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 기준에 비해 좁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내 판례에서 형법상 강간죄 구성 요건인 폭행·협박을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반항이 현저히 곤란한 정도’로 판단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강간죄의 범위를 최대한 좁게 해석한 이른바 ‘최협의설’이다. 전직 수행비서 김지은(33)씨를 네 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안희정(54) 전 충남지사 역시 강간죄로 기소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중앙일보 3월 7일자 8면>

형법상 폭행·협박 범위 좁게 해석 #‘증거 불충분’ 무죄 판결도 적잖아 #“세계 기준에 비해 가해자에 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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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소가 최근 발표한 ‘2017 상담 통계 및 상담 동향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이곳에서 상담받은 성인 강간 피해자(124건) 중 ‘최협의설’에 따른 강간죄 요건을 충족한 경우는 12.1%(15건)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단순히 울면서 성교를 거부하거나 거절 의사만 표시해 강간죄 구성 요건을 충족 못한 사례도 43.5%(54건)에 달했다. 나머지 55건(44.3%)은 상담 내용만으로 성폭행 여부를 판정하기 힘든 경우로 집계됐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내에선 그간 성폭력 피해자와 수사기관·법원의 판단 기준 사이의 인식 차가 빈번히 노출돼 왔다. 전북 무주에서는 지난 3일 성폭행 피해자 A씨(34·여)와 남편이 동반 자살을 기도해 둘 다 숨졌다. 이들이 남긴 유서에는 A씨를 폭행·강간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남편 친구 B씨(37)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1심 재판부는 B씨의 강간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경찰과 서울서부지검이 지난해 7월과 9월 각각 무혐의 처분했던 ‘연예인 지망생 성폭행 사건’을 놓고서도 서울고검이 같은 해 12월 재수사에 착수했다. 지난해 5월 한 연예인 지망생은 드라마제작사 대표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며 서울 용산경찰서에 신고했다. 이 사건을 처음 수사했던 검사는 “폭행·협박이 없는 비동의 간음은 법률상 처벌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김지은씨 측 법률대리인 역시 안희정 전 지사를 강간이 아닌 업무상 위계 또는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법률상으로 살펴보면 강간죄 성립이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최주필 법무법인 창비 변호사는 “실제로 법원 판례를 보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강간죄 단독으로 처벌하기보다는 강간치상 혐의를 적용하는 경우가 상당수”라며 “전 세계적 기준에 비해 너무 좁은 범위로 강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경우 한국과 달리 성폭력의 구성 요소를 ‘합의의 부재’로 판단하고 있다. 같은 영미법 체계인 영국은 당사자 간 명백한 동의를 우선해 폭행·협박이 전혀 없더라도 강간죄 처벌이 가능하다. 미국은 1960년대 강간죄 구성 요건 중 ‘강력한 저항’이란 개념이 삭제됐다.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는 모두 처벌하며 죄질에 따라 형량이 다르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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