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자유'냐 중국의 '빵'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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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가 아니라 자유의 시대가 될 것이다."(만모한 싱 인도 총리)

"샤워도 못 하고 교육도 못 받는 빈민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보시라이(薄熙來) 중국 상무 장관)

중국과 인도의 지도급 인사들이 '빵이 먼저냐, 자유가 먼저냐'를 놓고 최근 때아닌 격론을 벌였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 23일 보도했다.

◆ 자유와 성장 놓고 시각차=이례적인 이번 설전의 무대는 인도 뭄바이. 미국과 아시아의 관계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인 아시아 소사이어티가 주최한 경제 콘퍼런스에서였다.

싱 총리는 개막 연설에서 '21세기엔 자유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며 아직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중국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렸다. 싱 총리는 21세기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전망에 대해 "21세기는 '(인도처럼 민주주의가 꽃핀 나라가 주도하는) 자유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발언을 중국에 대한 일격으로 받아들인 중국 대표단은 발끈했고, 이튿날 역공에 들어갔다. 보시라이 장관은 연설에서 "민주주의는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데모하는 자유가 민주주의라면 이는 꼭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200명의 중국 대표단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보 장관은 전체 인구의 25% 이상이 빈곤선 이하인 인도의 치부를 건드렸다. 그는 "일부 개발도상국에선 자유란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빈민촌에 몰아 넣다 보니 교육도 못 받고 몇 년 동안 샤워도 못한다"고 꼬집었다. 회의장에서 멀지 않은 뭄바이 공항 인근에 100만 명이 몰려 사는 아시아 최대 빈민촌(다라비)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려는 의도로 비쳤다.

중국의 네 배인 인도의 높은 문맹률을 강조하려는 듯 "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되묻기도 했다.

◆ 서로 다른 사회 발전 모델=중국과 인도의 국가 운영 시스템과 경제 발전 모델은 사뭇 다르다. 중국 지도부는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이후 지금껏 경제 발전에 최우선 순위를 두는 정책을 폈다. 89년 천안문 유혈사태를 겪은 중국은 섣불리 정치 민주화를 추진할 경우 경제 발전에 차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정치 안정을 위해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당연하다고 본다. 중국 관변 학자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는 먹고살 만한 수준까지 경제 발전을 이룬 뒤에나 실현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왔다.

이에 반해 인도는 식민지 시절부터 영국식 선거제도와 타협을 강조하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다. 다당제가 정착했으며 중국과 달리 국민의 대표(하원의원)를 직접 뽑는다. 이로 인해 인도는 서구 언론으로부터 곧잘 '인구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불린다. 인도 지도자들은 그동안 "경제 발전 속도가 조금 늦더라도 민주적 절차와 합의를 거치는 것이 길게 보면 갈등을 줄이고 안정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인도식 발전 모델의 비교 우위를 주장해왔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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