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 "법무장관 발언은 월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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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23일 '유전무죄, 전관예우 청산과 시장경제 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열린 희망포럼 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23일 "지난해 미국에선 110억 달러 규모의 분식회계를 한 월드컴의 최고경영자에게 징역 2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며 "대우그룹의 경우 분식회계 규모가 월드컴보다 훨씬 컸지만 사장 1명만 5년형을 선고받은 게 고작"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관대한 법 집행이 우리 기업과 경제를 병들게 했다"고 덧붙였다.

천 장관은 이날 사단법인 '희망포럼'(공동의장 김상중.손봉호)이 '유전무죄.전관예우 청산과 시장경제 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연 토론회에서 이같이 격려사를 했다.

천 장관의 발언은 지난해 4월 확정된 대법원의 대우 관련 판결을 겨냥한 것이다. 당시 사기대출 등 혐의로 기소된 강병호 전 대우 사장에게 징역 5년, 장병주 전 대우 사장 등 6명에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천 장관은 또 "탈주범 지강헌 사건이 있은 지 18년이 흘렀는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사법 양극화라는 부끄러운 관행이 빨리 사라지게 사회적 강자들의 범죄를 검찰이 엄정히 수사하도록 독려하겠다"고 밝혔다.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이 사법 양극화를 완화하고, 양형평등을 실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법원 관계자들은 법무부 장관이 개별 판결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무부 장관이 개별 판결의 적정성을 논하는 것은 '사법 간섭'이자 월권이며 일선 판사들의 재량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천 장관은 지난해 9월에도 사법연수원 동기(1978년 수료)들과의 저녁모임에서 현직 법원장과 판사 출신 변호사 등 4명을 거론하며 "이 중 적어도 세 명은 대법관이 돼야 한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당시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는 성명에서 "공직자로서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분식회계가 사회적 관행처럼 많았던 한국과 분식회계가 중죄로 인식되는 미국을 같은 잣대로 평가한 것은 문제가 있다"며 "양국은 사법제도에도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백일현 기자<keysme@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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