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를 죽이나|정규웅<중앙일보출판기획의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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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흔히 「70년대가 소설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시의 시대다」고들 말한다. 실제로 80년대에 들어선 이후 시인과 시집은 급격한 양의 팽창을 보여 이미 70년대 수준의 2배를 넘어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시집들은 여러 달 동안 종합 베스트 셀러 1, 2위를 독차지하면서 판매부수 10만부 단위를 거뜬히 돌파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80년대의 이 같은 「시의 전성시대」 현상은 실상 유신시대의 종언과 함께 시작된 80년대의 특수한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경직된 시대적 분위기는 시의 다양화·다원화 현상을 촉진시켰고 그것은 곧바로 시의 대중화 현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근로자의 시, 농민의 시 따위의 형태로 쏟아져 나온 이른바 민중시들은 시대의 아픔을 겪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공감으로 남았고, 높은 수준을 보인 많은 서정시편들이 새삼 시의 아름다움, 시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해가 바뀌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갑작스럽게 시가 대중으로부터 외면 당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갖은 교태(?)를 지으면서 독자의 손길이 닿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수백 수천 종의 시집들이 책방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들과 시집전문출판사들은 등돌린 시 독자들을 돌려세우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나 좀처럼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푸념한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이처럼 시가 급전직하한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법하다.
우선 역시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로서 민중시의 퇴조를 꼽을 수 있다. 전망이 불투명하기는 하지만 민주화의 실현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이 엿보이는 상황 속에서 아직 새로운 대상이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민중시들이 대다수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순수시·서정시들은 베스트셀러가 된 몇몇 시집들로서 너무나도 쉽게 그 한계를 노출해버려 도무지 그 한계를 극복해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의 퇴조현상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일부 시인과 시집전문출판사들의 서투른 상업주의다. 이들은 이미 출간된 인기시집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속편 시집들을 내놓아 시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으며,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대어 대중적 호기심에만 영합하는 수준 낮은 시집들을 양산하여 시에 대한 독자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무모함을 보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일부 시들은 독자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더 요란하게 목청을 높여 구호 같은 언어들을 토해냄으로써 시의 본령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져 가는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다.
60년대 후반 구미 시단에서 「시는 죽었다」는 말이 회오리처럼 일기 시작했을 때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시와 시인의 허위성」이라는 의견이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었다.
의미 모를 언어의 유희를 이른바 난해시들이 제멋대로 판치던 당시의 우리 시단에도 정확히 적용되는 말이었다.
그때와 양상은 사뭇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의 시가 죽어가고 있다면 그 이유 역시 「시와 시인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 「시가 죽었다」던 무렵 「보브·딜런」이라는 가수의 노래와 그 가사가 어느 유명 시인의 시보다 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시로 발표된 「보브·딜런」의 가사가 어떤 시보다도 더 진실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시는 진실해야 한다. 시인은 더욱 진실해야 한다. 죽어 가는 시를 되살릴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시와 시인이 정직한 자세로 독자 앞에 마주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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