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부끄럽지만 나도 무관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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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송우영 사회2부 기자

송우영 사회2부 기자

‘사고’는 예기치 못 한 순간, 예상 못 한 곳에서 생긴다. 지난 3일 아침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화재도 그랬다. 이른 아침, 대형 병원의 푸드 코트에서 갑자기 불이 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긴장한 채 달려간 화재 현장은 다행히 평온했다. 환자만 수백 명이 있던 건물에 사상자는 없었다. 피해를 막은 건 만일을 대비한 ‘보호 장치’였다. 화재 직후 자동으로 작동한 스프링클러가 불길을 잡았고, 방화 셔터는 유독 연기가 퍼지는 것을 막았다.

문화계와 학계, 언론계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근 드러나고 있는 성폭력도 어디서, 어떻게 발생할지 예상하긴 힘들다. 충격적인 일을 겪은 당사자들에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세브란스 병원 화재와 달리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를 철철 흘리는 ‘치명상’을 입은 이유는 제대로 된 ‘보호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윤택씨가 19일 성폭행 폭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자 한 시민이 항의 피켓을 들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윤택씨가 19일 성폭행 폭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자 한 시민이 항의 피켓을 들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런 사실은 지난해 직장인 115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연구에서 성희롱을 겪은 응답자의 54%는 “특별한 조처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고 답했다. 이유를 묻자 세 가지 응답이 막상막하였다.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대응을 해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신고하면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

‘보호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그 사이 “안마를 해달라”던 희롱은 “‘가슴이 얼마나 커졌나 보자’며 가슴을 주무르고 성폭행을 하는 손”으로 커졌고, 피해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번져나갔다. 이들이 가슴에 묻어뒀던 사연을 밖으로 꺼낸 건 ‘미투’ 운동으로 생긴 거대한 사회적 관심이 ‘보호 장치’가 돼 줄 거란 믿음이 생긴 후다.

조직 문화나 미흡한 제도만을 탓할 것도 없다. 우리 모두도 누군가의 ‘보호 장치’가 되지 못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의 성폭력을 공개한 배우 이승비씨는 “그가 교주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연극계 관계자들은 “이 추행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했다.

연극계에 있는 당신도, 교수에게 성추행당한 동료의 사연을 들은 당신도, ‘동료 기자가 당한 게 진짜 성추행이었다면 본인이 신고했겠지’라고만 생각한 나도 누군가의 ‘보호 장치’가 될 기회를 놓쳐버렸다. 최근 불고 있는 ‘미투’ 열풍은 “나도 당했다”는 폭로 운동에 그치지 말고 “부끄럽지만 나도 무관심했다”는 우리 모두의 뼈아픈 반성이 돼야 한다.

송우영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