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몰려 자살' 의혹에 경찰 수사…'태움'이 뭐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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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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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 대형병원 간호사의 자살이 ‘태움’ 때문이라는 의혹이 일자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9일 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간호사 A(27·여)씨는 15일 오전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졌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A씨의 남자친구가 온라인에 ‘간호부 위선(윗선)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태움이라는 것이 여자친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는 글을 남겼다. ‘태움’은 간호사들 사이에서 영혼이 모두 탈 정도로 괴롭힌다는 의미로 통하는 은어다.

경찰 관계자는 “먼저 변사자(A씨)의 노트북·휴대전화 등을 수집한 후에 병원 관계자들도 불러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병원 관계자는 “설 연휴 동안 1차 조사를 한 결과 괴롭힘이나 인격 모독은 없었다. 2차 보강 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경찰 수사에 앞서 이번 간호사 자살 사건은 온라인에서 먼저 논란이 됐다. A씨의 남자친구가 자살의 이유로 든 ‘태움 문화’ 때문이다. 이 문화는 간호사계에서 오래전부터 만연돼 있었다.

A씨가 다닌 병원에서 일했다는 전직 간호사 이모(32·여)씨는 “내가 일했던 9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며 “울어야 혼내는 걸 멈췄고, 교대할 때 인계받을 일이 10개라면 2~3개만 알려주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한 대학교의 나이팅게일 선서식 모습.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는 상관 없습니다. [중앙포토]

한 대학교의 나이팅게일 선서식 모습.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는 상관 없습니다. [중앙포토]

교육을 빙자한 태움에는 인격 모독도 다반사다.
서울에 또 다른 대형병원에 다니는 입사 5년차 간호사(27·여)는 “프리셉터(경력 간호사)한테 지방대 나왔으면 나대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환자 앞에서 처지를 잘못했다고 면박 받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2년차 간호사 김모(25·여)씨도 “‘넌 몇 달이 됐는데 아직도 쓸모가 없냐. 내 주위 2m 근처엔 오지도 마라’ ‘너 보면 스트레스받으니깐 일찍 퇴근이나 해’ 같은 말을 듣는 게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지나친 업무’도 마치 거쳐야 할 과정인 양 이뤄졌다.
6년차 간호사 이모(29·여)씨는 “12시간 동안 일하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갔다. 다음 근무자인 선배가 ‘신입한테 인계받기 싫다’고 해 2시간 넘도록 대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현직 간호사들에 따르면 태움은 병원이 들어온 지 6개월~1년간 이뤄진다. 기간이 길다 보니 태움으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이번 자살 사건이 발생한 후 온라인에 올라온 글에는 “신규 시절에 한 달간 하혈을 하며 반 년간 생리가 끊겼다’(xgy*********) ‘스트레스 받아 원형 탈모가 생겼다’(jn*****)는 다양한 피해 사례가 있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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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간호사를 대상으로 하는 태움 외에도 ‘임신 순번제’ 같은 만연화된 악습도 있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6년차 간호사 박모(30·여)씨는 “선배들이 ‘임신한 거 후배한테 부끄럽지도 않냐’는 얘기를 했다. 주변 간호사에게는 ‘너네 친구 잘 사귀어라’라고 말하며 따돌림을 종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기혼자다. 임신 순서를 어겨 이런 얘기를 들었다.

태움이 생겨난 것에 대해 간호사들은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긴장시키기 위해서 생겨난 문화”라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도를 지나쳤다”고 입을 모았다.
한 네티즌은 ‘간호 조직 문화 정말 바뀌어야 한다. 더는 개인의 문제나 특정 병원만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조한대·김정연·정용환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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