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인의 적 '평화의 행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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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와 닮아 대역(代役)을 맡았던 이라크인, 9·11 테러 때 동료를 잃은 미국 뉴욕의 소방관, 테러로 어머니를 보낸 이스라엘 여성…. 테러와 분쟁의 상흔을 지닌 10명이 서로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건너기 힘든 사하라 사막을 낙타를 타고 횡단하고 있다. [사하라사막 AP=연합뉴스]

"가슴속에 응어리진 모든 분노와 원한을 사하라 사막에 묻고 오겠습니다."

전쟁과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사는 10인이 이라크전 3주년을 맞아 '평화의 캐러밴'에 나섰다. 얼어붙은 중동 평화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브레이킹 디 아이스'라는 국제 평화단체가 조직한 사하라 사막 횡단 모험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종교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평화의 사절들은 모래바람을 뚫고 18일 이집트 서부의 사막에 모습을 드러냈다. 6일 예루살렘을 출발한 이들은 최종 목적지인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까지 한 달간 5500㎞의 대장정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은 19일 카이로 서남부 400여㎞ 지점에서 마침내 '죽음의 모래 광야' 사하라 사막에 진입했다.

3월이지만 낮 기온은 벌써 35도까지 오르고 밤에는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심한 일교차가 이들을 괴롭히고 있다. 앞으로는 더욱 힘들어진다. 카마신(Khamasin)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모래폭풍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시련은 이들이 이미 겪은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보자. 팔레스타인 자폭 테러로 어머니를 잃은 이스라엘 여성, 9.11 테러로 동료를 잃은 뉴욕시 소방대원, 절친한 친구를 미군의 이라크 공습에서 잃은 이란 여성.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의 아들 우다이를 닮아 후세인 정권 시절 우다이 대역을 했던 전 이라크 관료, 레바논전쟁 때 붙잡혀 2년간 포로생활을 한 이스라엘 비행사 등. 증오를 뛰어넘어 평화를 빚어내기 위해 극한의 모험에 나선 영웅들이다.

여성 2명을 포함한 10명의 대원은 경부고속도로(417㎞)를 13번 오갈 거리를 대부분 낙타를 타거나 걸어서 이동한다. 피치 못하게 자동차로 이동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9.11테러 구조활동의 상징인 뉴욕시의 낡은 소방차 한 대를 준비했다.

"10명이 같은 길을 걷지만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느낌도 다를 겁니다. 그러나 오늘의 행군이 세계 평화에 작은 보탬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다들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인으로 처음으로 리비아 땅을 밟아 보는 갈리트 오렌은 "중동 평화를 위해 한 줌의 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브레이킹 디 아이스'의 설립자 헤스켈 나타니엘은 "이번 사하라 사막 횡단이 끊이지 않는 중동 분쟁의 얼음을 깨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후원자들도 쟁쟁하다. 달라이 라마 티베트 지도자,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총리,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힐러리 클린턴 미국 상원의원, 마이클 블룸버그 미국 뉴욕시장 등이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 브레이킹 디 아이스(Breaking the Ice)=분쟁지역 주민들 간의 적대적 감정을 '신뢰와 존중'으로 바꾸는 걸 목표로 설립된 평화단체. 독일 베를린에 본부가 있으며, 이스라엘 태생의 헤스켈 나타니엘의 주도로 2004년 출범했다. 그 해에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4명씩 8명이 남극을 탐험하며 중동 평화를 빌었다. 전쟁과 분쟁의 상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회원이다. 영어 자체의 뜻은 서먹서먹한 관계를 깨는 일을 말한다.

'평화의 캐러밴' 참가자는

▶라티프 야히아(42)

이라크 태생/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아들 우다이 대역을 맡음

▶대니얼 셰리던(45)

뉴욕 태생/9.11 테러 때 동료 소방대원 343명을 잃음

▶갈리트 오렌(40)

이스라엘 태생/1995년 텔아비브에서 발생한 버스 자폭테러로 어머니를 잃음

▶네다 사르마스트(37)

이란 태생/이란.미국 시민권자로 9.11테러 때 양쪽으로부터 의심을 받음

▶길 포길(49)

이스라엘 태생/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1982년 레바논에서 추락해 포로가 됨

▶모하마드 아잠 알라르자(23)

사우디아라비아 태생/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봉기) 도중 사촌을 잃음

▶레이먼드 벤슨

미국 태생/베트남전 두 차례 참전한 뒤 대령으로 전역/쓰나미 때 자원봉사

▶예프겐 페트로비치 코주시코(30)

우크라이나 태생/2003년 우크라이나군으로 이라크전 파병

▶야흐야 와르다크(39)

아프가니스탄 태생/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친척들을 잃음

▶셰이크 이스하크 타하(53)

팔레스타인 태생/이스라엘에서 1년 반 투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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