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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한복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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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그러나 지금까지 보이던 한복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주모나 농민이 입던 생활 속의 옷의 아니라 한결같이 고급스럽고 은은한 멋이 배어나는 ‘작품’급이다. 한복의 멋스러운 재해석이 대중매체를 무대로 대중의 눈높이를 올려놓고 있다.

#'스타일리시 한복' 대중의 눈길을 잡다

멋스럽고 새로운 감각의 한복은 스타일을 중시하는 감성 사극이 등장하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2003년 개봉한 영화 '스캔들'. 스캔들의 의상은 제일모직 '구호'의 디자이너인 정구호 상무의 작품이다.

정 상무는 "영화의 배경인 18세기의 한복을 재현해보고 싶었다. 18세기는 조선의 문화가 꽃피던 전성기로 의상의 화려함도 대단했던 때"라고 소개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평민이나 궁중 의상이 아닌 상류층 의상. "다홍색 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나 상하의가 모두 흰색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 의상으로는 사대부 간 음모가 난무하는 영화의 분위기를 살릴 수 없었다"는 얘기다.

대중에게 어필하려면 시대 배경에 맞춘 무조건적인 고증과 재현은 한계가 있다. 대중문화의 주소비층인 젊은 세대에겐 완벽한 고증은 지루함을 의미할 뿐이다. 대신 극중 캐릭터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 관객의 눈길을 잡을 수 있다. 여기에 '스타일리시 한복'의 출현 이유가 있다.

영화 왕의 남자는 조선 중기 연산군 시대가 배경이다. 고증대로라면 연산은 붉은색 용포(곤룡포)를 입어야 한다. 용포는 붉은색이나 노란색으로 만드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지만 심현섭 의상팀장은 붉은색 대신 짙은 푸른색을 택했다. 그는 "선대에 비해 부족한 카리스마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신하들에 대한 복수심 등에서 비롯된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또 여성들의 한복도 치마가 허리 라인까지만 오고 저고리 기장도 길다. 이는 고려나 삼국시대 때 스타일을 변형한 것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 이젠 '쿠튀르 한복'의 시대

1990년대가 생활한복의 시대였다면 이젠 '쿠튀르 한복'의 시대다. 고급 맞춤복을 뜻하는 '오트 쿠튀르'에서 따온 용어인 쿠튀르 한복은 주로 서양의 드레스를 대체하는 식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런 한복의 원조는 디자이너 이영희씨다. 치마와 저고리로 대표되는 한복의 기본 공식을 깨고 치마만 입힌 스타일의 이브닝 드레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최근 젊은 시청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궁에 나오는 의상도 한복을 모티브로 한 드레스가 많다. 궁에 의상을 협찬하고 있는 '꼬세르' 대표인 배영진 디자이너는 "이제야 한국적인 드레스를 대중이 알아줘서 기분이 좋다. 우리의 분위기가 나면서 예쁘게 입을 수 있는 드레스를 위주로 작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얼마 전 베를린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레드 카펫을 밟은 영화배우 이영애씨도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정통 한복을 몸에 걸쳤다. 이영애씨의 한복은 '한은희 한복'의 한은희 디자이너 작품. 한은희씨는 드라마 '용의 눈물'과 '명성황후' 등에 의상을 협찬하기도 했던 유명 디자이너다. 이씨의 한복은 무늬가 잘게 들어간 비단인 '모본단'에 짙은 녹색과 검은빛이 도는 색감을 사용, 심사위원에 어울리는 중후함을 살렸다.

최근 정구호 상무는 패션잡지 W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한복을 선보였다. 양장 디자이너 출신답게 동정에는 레이스 처리를 하고 원단은 모두 양장의 소재를 썼다. 하지만 형태(실루엣)는 한복의 원형을 따랐다. 한복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는 퓨전의상인 셈이다.

한복의 고급화를 이끌고 있는 디자이너들은 하나같이 상향 지향적인 문화의 습성을 파악해 우리 옷의 세계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영진 디자이너와 정구호 상무는 "한 나라의 패션이 발전하려면 하이 패션이 좋아져야 한다. 사치가 아니라 문화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어차피 전통의상이란 것을 평소에 입기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 기모노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특유의 화려함을 살려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최근 TV나 스크린 속을 종횡무진하는 쿠튀르 한복이 화려한 고급의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

조도연 기자

한복 세계화 앞장서온 디자이너 이영희씨

"외국서 먼저 안 한복의 아름다움 우린 이제 눈 떠"

"이제야 국내에서도 한류가 부는 것이죠. 외국에선 이미 한복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서 시작된 한류 덕분에 비로소 한복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한 거예요."

프랑스 파리 기성복 컬렉션에 24번이나 참가하며 한복의 세계화에 앞장서온 '이영희 한국 의상'의 이영희(69.사진) 디자이너는 최근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한복의 열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드라마 '대장금'이 인기를 얻고 사극 영화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눈치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우리 문화 중에서 경쟁력이 높은 분야가 바로 한복과 음식이에요.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미우치아 프라다도 여기서 한복을 사갔다니깐."

이영희 선생은 1980년대부터 한복의 세계 진출을 위해 애써온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저고리를 벗긴 치마 드레스와 서양 옷인 셔츠에도 입을 수 있는 수가 놓인 조끼, 속이 비치는 모시를 이용한 재킷 등 한복과 서양 옷의 장점을 결합한 일종의 퓨전 의상이 그의 특기다. 그는 일찌감치 한복의 드레스화를 시도했는데, 서양 옷의 특성을 알기 위해 양장 개인 지도까지 받았다.

"사실 예식이나 파티용으로 한복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저변이 넓지 않은 게 문제예요. 한복 디자이너가 10만 명이나 된다는데 외국 시장에 도전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새로운 감각과 정열을 가진 후배들을 기다려봅니다."

조도연 기자

*** 바로잡습니다

3월 21일자 22면 ME'한복의 재발견'에서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여성의 한복이 고려나 삼국시대 스타일을 변형해 저고리가 길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연산군(1476~1507) 때 여성 저고리 길이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고려나 삼국시대 스타일의 변형이 아닙니다. 심현섭 의상팀장도 길이가 긴 저고리를 설명하면서 고려와 삼국시대 의상을 예로 든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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