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부유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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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떠돌이 도적떼는 한 마을을 노략질할 때 깡그리 거덜낸다. 붙박이 도적들은 다르다. 주민들의 생업이 가능할 만큼 남기고 턴다. 다음 기회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힘이 붙은 도적떼는 눌러앉아 다른 도적들을 막아주고 대가를 독점적으로 챙긴다.

마을이 부유해지면서 도적들의 수입도 늘 뿐 아니라 권위도 높아진다. 돈과 권위가 쌓인 도적은 귀족으로 탈바꿈하고 우두머리는 왕이 된다. 도적들의 정기적인 노략질은 '세금'이란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된다.

미국 정치경제학자 맨서 울슨의 역사적 추론이다. 단순화하면 왕과 귀족이 거둬들인 세금이나 깡패들이 빼앗아가는 자릿세나 그게 그거라는 얘기다. 도적떼가 떠돌이에서 붙박이로, 그것도 합리적인 붙박이로 바뀌는 게 정치의 근대화라는 논리도 성립된다.

왕정국가에서 시민국가로 바뀌는 과정 역시 세금과의 전쟁이다. 경제력을 축적한 시민계급이 왕과 귀족의 약탈을 참다못해 혁명을 일으켰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일으킨 것도 영국 정부가 세금을 과도하게 물렸기 때문이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총을 드는 애국자는 있어도, 자진해서 세금을 내겠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비약하면 국가를 위해 총을 드는 것도 전쟁에서 져 다른 나라에 세금 착취당하는 일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로 넘어오면 국민이 뽑은 의회에서 세금이 정해진다. 쟁점은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 및 집단의 이해관계로 바뀐다. 공동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면서 국민 전체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접점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다.

극단적인 사례가 '부유세'다. 부자들이 국가 전체를 위해 돈을 내라는 것이다. 유럽에선 부유세를 피해 아예 국적을 옮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세금은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경제만 위축시킨다는 비판도 많다.

정부는 최근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고가 아파트의 재산세를 높이고 땅부자에게 종합부동산세를 물리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여러 차례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일이다.

즉각 '부동산 부유세'라며 조세저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야당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공동체와 개인의 이익 충돌, 실효성 논란 등 세금의 본질적이고도 해묵은 쟁점이 이번 재산세 논쟁의 감상 포인트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