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4. '주먹 시절' 예고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1989년 ‘다리’지에 실린 필자의 글 첫 페이지. 캐리커처가 눈길을 끈다.

10대 시절 얘기를 하기 전 양해부터 하나 구해야겠다. 내가 얼마나 수양이 덜 된 사람인지를 보여주게돼 하는 얘기다.

10여 년 전 한 젊은이와의 시비부터 털어놓는다. 사고를 친 뒤 치료비 70만원을 벌기 위해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주간으로 있던 잡지 '다리'의 1989년 10월호에 글을 쓴답시고 원고지 100매와 씨름을 해야 했다. 생애 첫 원고였다.

그 해 초여름 저녁, 무척 더웠다. 불쾌지수도 높았다. 막노동일을 마치고 안양 가는 총알 택시에 합승했다. 일이 꼬이려는지 옆 사람이 자꾸 시비를 걸어왔다. 30대인데 무척 건장했다. 그가 횡설수설했다.

"당신, 중동 얘기를 자꾸 하는데 가보긴 했어?"

거기까지는 참았다. 발끈했던 것은 다음 말.

"자꾸 조선 땅, 조선 땅 하지마셔. 당신 빨갱이 아냐?"

순간 경찰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당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86년 말 '말'지 사건으로 쫓기던 민주언론운동협회의 사무국장 김태홍(현 국회의원)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그때 질리도록 들었던 빨갱이 소리를 또 듣다니….

우리 둘은 택시에서 내렸다. 순간 오른손 주먹을 그 청년 얼굴에 날렸다. 정통으로 한 방, 그걸로 끝이었다. 사내는 길바닥에 쓰러졌다. 거품까지 물었다. 눈엔 흰자위만 보였다. 전형적인 뇌진탕 증세였다.

"선생님, 이 사람 동네 불량배니까 도망치세요."

택시 기사가 내 셔츠를 잡아당겼지만, 나는 막 달려온 순찰차에 올랐다. "할아버지가 웬 주먹질?"하며 어리둥절해 하던 경찰관의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내가 경찰서로 달려와 혀를 끌끌 찼다. 후배들인 레슬러 이왕표의 무리 대여섯 명이 위문차 찾아왔다. 그들이 몇 마디를 던졌다.

"어느 녀석이 대들었어요?"

"형님, 그 연세에 주먹을 쓰세요?"

창피했다. 주먹이 한스러웠다. 병원에 실려가 MRI까지 찍었던 젊은이는 다음날 오전 10시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완쾌된 그와는 "형님 동생으로 살자"며 화해했다.

한참 후에 그가 궁금한 듯 "그런데 형님, 그때 저를 망치로 내리쳤어요?"하고 물었다. 내가 껄껄 웃으며 "아우님, 택시 타는 사람이 망치 들고 타던가?"하고 대꾸했다. 서로 웃었다. 이상이 '다리'에 내 글을 쓰게 된 배경이다. 이후로는 손을 깨끗이 씻었다.

따라서 내가 주먹으로 알려진 일화들은 대부분이 10대 시절 얘기다. 반세기 전 얘기라서 은근 슬쩍 양해 구하고 넘어가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53년 봄 창경원에서 당시 켈로부대로 통하던 북한 침투 특수부대인 KLO 군인패와의 싸움으로 시작해보자. 사회가 지금과는 천양지차였던 무렵이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란 험하게 성장한다. 이번 주 몇 차례 부끄러운 고백을 할 터이니 그걸 한 늙은이의 '이쁜 거짓말'정도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배추 방동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