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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뇌물죄 근거였던 ‘묵시적 청탁’ 2심은 인정 안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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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재용(50) 삼성전자 부회장이 석방된 것은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의 근본 인식이 1심 재판부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의 본질을 부도덕한 정경유착으로 봤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강요에 의한 뇌물 사건으로 봤다.

2심 판결 1심과 뭐가 달라졌나

이 같은 항소심 재판부의 인식은 이 부회장에 대한 전체 양형에도 영향을 줬다.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만남이 경영권 승계라는 ‘포괄적 현안’과 맞아떨어졌고, 이후 부정한 청탁과 뇌물로 이어졌다는 게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시각이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부정 청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1심 재판부가 뇌물죄의 근거로 삼은 ‘묵시적 청탁’ 논리마저 부정하면서 재판의 판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재판부는 최순실(62)씨와 딸 정유라(22)씨가 무상으로 사용한 말(馬) 사용료, 용역비 등 일부만을 뇌물로 인정했다.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1심과 달라진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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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승계작업 존재도 인정 안돼

정씨가 훈련에 사용한 각종 ‘명마(名馬)’의 소유권이 삼성 측에 있다고 본 재판부의 판단은 결정적인 감형 요인이 됐다. 앞서 항소심 공판 내내 특검과 삼성 측은 말이 누구 것인지를 놓고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특검은 말의 실소유권이 최씨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삼성 측은 “계약서에 따라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고 맞섰다. 하지만 삼성의 소유권이 인정되면서 1심에서 뇌물로 봤던 거액의 말 구입 대금 대신 ‘말 무상 사용료(금액 산정 안 됨)’와 용역비(약 36억원)만 뇌물로 인정됐다.

이 같은 법원의 판단이 이 부회장의 항소심 형량(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으로 반영됐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해석이다.

서울고법 형사13부(부장 정형식)는 이 사건의 본질을 ‘정경유착’이 아닌 ‘겁박에 의한 수동적 뇌물 공여’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최고 정치권력자인 박 전 대통령이 국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의 경영진을 겁박하고, 박 전 대통령의 측근인 최씨는 그릇된 모성애로 사익을 추구했다”고 밝혔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의 요구가 거절하기 힘든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부회장 등에게 (모종의 혜택에 대한) 기대 가능성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삼성에 말 소유권 … 사용료만 뇌물

1심 재판부가 ‘자본 권력’인 이 부회장과 ‘정치 권력’인 박 전 대통령을 동일선상에 놓고 부도덕한 유착이 있었던 것으로 봤다면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을 강요에 의한 ‘피해자’로 인식한 것이다. 재판부의 이 같은 인식이 유·무죄를 가르는 데까진 미치지는 못했지만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양형 요소로 작용했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해석이다. 살시도·비타나·라우싱 등 명마들의 소유권이 삼성에게 있다는 판단은 승마 지원 관련 뇌물액의 감소(약 73억원→36억원+말 무상 사용료)로 이어졌다.

앞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삼성 측이 정씨에게 용역 대금, 말 구입 대금, 차량 구입 비용 등 78억원을 뇌물로 제공했다고 공소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이 같은 특검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여 차량 구입 비용을 제외한 73억원을 뇌물로 판단했다. 특히 비타나·라우싱의 소유권이 최씨에게 있다고 봤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말의 구입 대금 대신 정씨가 말과 차량을 무상으로 사용하면서 얻은 이익을 뇌물로 봤다. ‘명마의 가격’ 대신 ‘무상 사용료’를 뇌물로 인정한 셈이다. 삼성 측이 용역비 명목으로 코어스포츠의 독일 계좌에 입금한 36억원도 뇌물로 인정했다.

이 같은 결정의 근거는 말의 소유권이 삼성에게 있다는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삼성이 말을 소유한 이상 정씨 등이 이를 마음대로 사용했다고 해도 말의 구입 대금(말 가격)은 뇌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말의 소유권은 (최씨에게) 이전되지 않았다. (최씨의) 목적은 정씨에 대한 승마 지원이었을 뿐 고가의 말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영재센터 지원금 뇌물·횡령 불인정

말이 삼성 것이라는 판단은 횡령·범죄수익은닉 혐의에 대한 일부 무죄로 이어졌다. 앞서 1심 재판부가 이 부회장이 뇌물 공여를 위해 횡령했다고 봤던 명마 구입 대금, 영재센터 지원금(16억8200만원)은 모두 횡령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재산 국외도피 혐의는 아예 무죄로

이 부회장은 이 과정에서 뇌물공여(징역 3~5년)보다 형량이 센 재산국외도피(50억원 이상 시 징역 10년~무기징역) 혐의도 벗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삼성이 독일로 송금한 용역비 36억원을 해외로 도피시킨 돈으로 봤다. 반면 항소심에선 “송금 행위가 도피에 해당하지 않고, 피고인들에게 범행 의도도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용역대금이 뇌물로 건네진 것은 맞지만 사용 권한은 최씨 등에게 있었기 때문에 삼성 측이 자신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용역비를 빼돌렸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1심에서 논란이 됐던 ‘묵시적 청탁’도 인정하지 않았다. 1심의 판단은 개별 현안에 대한 명시적인 청탁은 없었더라도 경영 승계라는 포괄적 현안에 대한 묵시적 청탁은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정씨에 대한 각종 승마 지원과 영재센터 지원이 뇌물로 인정됐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승계작업’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이 실제 이 부회장의 지배력 확보에 유리하게 작용했더라도 여러 효과 중 일부일 뿐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작업’으로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김한규 전 서울변호사회장은 “묵시적 청탁 논리가 뒤집히면서 제3자뇌물죄로 기소된 영재센터 지원까지 무죄가 선고됐다”며 “향후 상고심에서도 이 부회장 측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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