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지로그 야구'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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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미국 야구는 WBC에서 강렬한 개성을 드러냈다.

한국은 4명의 전력분석 요원을 통해 일본과 대만.미국의 전력을 세세히 분석했다. 여기에 일본에서 뛴 경험이 있는 선동열 투수코치와 이종범.구대성, 그리고 현재 요미우리 소속인 이승엽은 자신들이 체험한 일본 야구의 특징과 비밀을 동료에게 낱낱이 전했다. 메이저리그 소속인 박찬호.서재응.김병현도 그렇게 했다. 이들이 제공한 데이터는 '대한민국'이라는 초대형 서버에 저장됐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은 '애국심'이라는 이름의 스위치를 통해 강한 출력을 뿜어냈다.

한국의 '디지털 야구'는 일본을 무색하게 했다. 한국 타자들은 일본의 잠수함 투수 와타나베 슌스케를 공략하기 위해 타석에서 홈플레이트 가까이 붙어 섰다. 와타나베는 몸맞는공이 나올까봐 장기인 몸쪽 공을 던지는 데 애를 먹었다. 미국전에서는 상대 투수 댄 휠러의 구질을 충분히 파악한 뒤 최희섭을 대타로 기용해 승부를 가르는 3점 홈런을 뽑아냈다. 적시에 이뤄지는 투수 교체도 정교한 디지털 야구였다.

그러나 일본과 경기할 때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데이터의 신통력을 마비시키고도 남을 강력한 힘이 한국 선수들의 몸에 충만했다. 그 이름은 디지로그였다. 일본이 두려워한 정신력이 두 번이나 일본 선수들의 명료한 두뇌와 잘 훈련된 근육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미시(微視)의 세계에 집착하는 오 사다하루(王貞治)일본 감독의 '스몰 볼(small ball)'을 강인한 투혼과 신뢰가 뒷받침된 김인식 감독의 '휴먼 볼(human ball)'이 압도해 버린 것이다. 미국도 일본도 난생 처음 경험하는 디지로그의 세계, 그것이 휴먼 볼이었고, 세계 야구의 중심을 뒤흔든 대한민국의 야구였다.

일본은 WBC에서도 특유의 '디지털 야구'를 펼쳤다. 일본은 1라운드 B조 경기에 전력분석관 20명을 파견해 미국.캐나다.멕시코의 전력을 분석했다. 디지털 야구는 정교한 데이터와 선수들의 숙련도로 집약된다. 상대팀 선수 한명 한명의 장단점을 모두 분석한 뒤 팀 전력을 산출했다. 분명히 한국은 일본이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오 사다하루 감독은 "한국의 의지가 우리보다 강했다"고 말했다. 스즈키 이치로는 "한국의 메이저리거들은 평소에는 타국에서 위축된 경기를 했으나 한국의 국가대표로 동료와 힘을 합쳐 경기를 하기 때문에 더 힘을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숙련된 기술과 빈틈없는 데이터를 갖고도 한국에 진 이유를 정신적인 면에서 찾아낸 것이다.

미국 야구는 힘과 기술.데이터 등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궁극의 야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WBC에서는 주먹구구로 일관했다. 미국은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1라운드에 단 한 명의 전력분석관을 보냈다. 해마다 열리는 미.일 올스타전과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일본 선수들을 통해 일본 야구를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한국은 그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겼다. 한국전 선발 투수인 돈트렐 윌리스는 한국 선수에 대한 준비도 없이 "50개의 공으로 5이닝을 막겠다"고 장담했지만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았고, 3회만 던지고 강판됐다. 1등을 하겠다는 '아날로그적'인 의지는 강했지만 준비가 없었다.

19일 낮 12시(한국시간). 디지로그와 디지털이 다시 맞붙는다. 누가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승부. 그러나 두 차례의 경기를 통해 한국은 이미 디지로그의 위대한 힘을 증명했다.

허진석 기자

◆ 디지로그='굴렁쇠 소년'으로 상징되는 88서울올림픽 문화행사를 기획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친 말로서 단편적인 기술용어가 아닌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다. 이 전 장관은 디지로그의 힘을 정보와 데이터로 요약되는 디지털에 아날로그의 감성을 접목해 제3의 창조적 공간을 만들어 내는 힘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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