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목숨 바쳐 얻은 건 패배의 쓴잔|소의 8년5개월 끈 아프간 침공 득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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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사 3천8백여 명, 부상 수십만 명, 3백억 달러 이상의 전비탕진 그리고 사실상의 패배.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 8년5개월만에 맞은 파산선고의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얻고자 했던 아프가니스탄에 심어진 뿌리깊은 반소감정은 무엇으로도 무마하기 어렵게 됐다. 사회주의 동맹국가들에 대한 위신상실, 서구제국에 비쳐진 침략자로의 인상도 이번의 철군결정으로 모두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다.
전사상자의 가족이 갖게 될 원망, 사회적 부 적응 현상을 보이는 참전젊은이들의 문제와 소득 없는 전비로 압박 받아 온 국내경제 등 아프간참전 8년여를 결산하는 소련은 내심 착잡한 기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소득도 있었다. 장교들의 대대적인 실전 경험은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참전에서 얻은 큰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교훈일 것이다.
민족의 집단적 자아가 눈뜰 때 강대국의 폭력적 내정간섭은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 제국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한 사회주의는 더구나 혁명의 내적 역량이 축적되지 않았을 때 사회주의의 강제적 이식은 불가능하다는 점, 70년대 초 이집트에서 수십 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해주고도 수애즈 운하를 향유할 수 없었던 쓰라린 경험이 보여주듯 이슬람사회와 사회주의는 아직 상용 점을 찾기에 이르다는 사실 등이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전장은 험준한 산악지역, 독특한 민족성 등 여러 특수성이 있어서 이 같은 교훈을 일반론으로까지 확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관한 한 소련에 이보다 더 분명한 교훈은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소련의 참전결정이 어떤 계산에 근거한 것이었나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결과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참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전략적으로는 18세기초의 피터 대제이후 제정러시아가 꾸준히 계속해 온 극동과 인도양에서의 부동항 건설을 꿈꾼 전통적 남진정책의 일환이며 전술적으로는 이란회교혁명의 돌풍이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에서 구축한 전략적 이점을 앗아가지나 않을까, 또는 소련연방내의 회교민족으로 옮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적 선제 공격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프가니스탄을 동구처럼 위성국화 한 다음에 이란·파키스탄접경지역과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살고 있는 발루치스탄 족을 사주해 독립국가를 세워 인도양에까지 진출하겠다는 복안을 세운 침공이라는 것이다.
이밖에 아프가니스탄이 양질의 우라늄을 비롯, 석유·석탄·철 등 자원의 보고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자신들이 세운 위성정부가 민중봉기에 의해 붕괴될 경우 동구를 비롯, 제3세계에서 위신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유가 모두 외교적으로는 최후의 수단이라 할 군사적 행동을 감행해야 할만큼 절박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은 1919년이래 소련과 우호적인 비동맹국가였기 때문에 설사 73년 이후의 친소정부가 무너진다 해도 최악은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련은 이제 「부담스러운 짐」을 덜게 됐다. 「고르바초프」의 정치와 외교의 신사고가 보여주고 있는 사회주의적 실용주의가 「승산 없는 싸움」에 대해 내린 결단에 의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개혁과 개방정책의 가시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경제적 현실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고 6월 당 대회와 5월의 정상회담을 겨냥한 포석이기도 하다.
21세기까지 서구의 생산력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서방측의 기술·자본금원조 획득이 용이한 국제환경조성의 필요성과 함께 국민의 자발적 참여제고에 성패가 달려 있는 개혁과 개방의 내적 충실을 기하기 위해서도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손을 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로서도 이번의 철수 결정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소련언론에 따르면 벌써부터 보수파들은 『개혁과 개방은 인종분쟁과 이념적 이단만 초래했을 뿐』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더구나 소 군부의 자존심까지 건드렸을지도 모를 이번 철수 결정이 설득력 있는 생활수준향상으로 가시화 되기까지「고르바초프」는 더욱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될 것이다. <이재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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