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전대통령의 처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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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전대통령이 헌법이 정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물러나고 일체의 공직에서 떠나는 것을 보는 심정은 한마디로 착잡하다.
그가 재임 중 자기동생에 의해 저질러진 엄청난 새마을비리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스스로의 말대로 동생문제 하나 단속 못한 처지에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수행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도 올바른 처신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헌정사상 처음으로 주어진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 정부이양의 선례를 남긴 전대통령이 오늘의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이라고만 치부하고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전직 대통령이 평온한 심정으로 퇴임 후 평화스런 생활을 누리는 일이 축적돼야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도 정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전전대통령부터 그런 퇴임 후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임기가 끝나면 권력을 내놓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마치 일대 결단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게끔 돼야 민주정치의 뿌리가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기대는 새마을사건이 터지고 전 대통령의 다른 친·인척들에 대해서까지 이런저런 얘기가 나옴으로써 무너지고만 셈이다.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이번 일을 보고『물러나서 이렇게 될 바에야 왜 권력을 내놓겠느냐』는 심리가 혹시라도 공직 사회에서 배태될까 걱정이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전직대통령에게 퇴임 후 마음 편한 생활을 배려하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새마을 사건 같은 문제가 터진 이상 전직대통령이라 하여 그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대통령의 공직사퇴가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지만 전직대통령의 마음 평온한 모습을 볼 기회를 놓치게 됐다는 점에서 착잡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은 권력과 공직사회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최고의 권력자에서부터 낮은 지위의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퇴임 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평소의 자기관리와 주변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번 일은 보여준다.
혹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 전대통령이 겪은 것과 같은 치명적인 일이 현재 자기주변에서 진행되고 있지나 않은지 챙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공직에서라도 물러난 후 마음 편하게, 뒤끝을 걱정함이 없이 물러날 수 있도록 평소 늘 조신, 근신하는 자세가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현재의 권력핵심이나 그 측근들은 새삼 자기와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공직자의 주변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호가호위 적 위세로 거드럭거리다가는 자신은 물론 그 공직자까지 망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빽」쓰고 기대고 위세를 빌어 한 건을 하고 하는 따위의 문화는 이제 우리사회에서 추방돼야 한다.
전대통령은 이제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갔다. 퇴임 후에도 정치세력을 거느릴 것으로 보는 관측도 있었고 그에 따른 이러 저런 얘기들도 많았지만 이젠 그런 얘기가 나올 현실적 소지도 거의 없어진 셈이다.
불과 두 달 전까지도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였던 인물의 등장과 퇴장의 8년간을 생각하면 새삼 깊은 감회를 갖게 되고 그가 남긴 교훈과 권력의 운용 및 그 관리의 문제 등을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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