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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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국에서는 근년에 몇 차례 놀라운 고고학적 유물발굴이 있었다.
60년대에 장사 마왕 퇴 고분을 발굴하고는 눈부신 중국 고대문화의 진수를 확인했고 70년대에는 기시황릉 발굴로 지하에 벌여 놓았던 엄청난 실물대 기마 군단의 위용을 드러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80년대 초에는 발해연안 대능하 유역 동산 취에서 기원 4천년전의 대형 신전유구와 소조상, 쌍두옥룡, 그리고 적석총과 석관묘가 출토됐다.
하은주 3대에 앞서 전설로 취급되던 삼황오제시대를 실증하는 유적으로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우리 역사에도 신화나 전설 취급을 받는 시대가 있다.
단군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삼국초기 조차 학계 일부에선「전설」취급을 하는 형편이다.
국가의 형성기를 기원2∼3세기까지 늦춰 보는 견해까지 있다.
국사편찬 위의「한국사」마저도『원삼 국기라고 부르는 진정한 초기철기단계는 김해 패총발견의 화천(기원14년)과 낙랑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서력기원 개시 전후로 보고 그 종료를신라·백제의 실질적인 건국기인 서기 3백년께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팀이 발굴한 의창군 다호리 유적은 그런 그릇된 견해의 잘못을 반성케 하고 있다.
완전한 형태로 나온 목관은 물론 정교한 칠기와 철기유물들은 3국 이전 삼한시대의 문화가 결코 부족국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칠기 자체가 가장 오랜 유물이다. 지금까지는 경주의 천마총에서 나온 작은 그릇 류가 고작이었다.
뚜껑이 있는 통 모양의 칠기가 있는가 하면 원형 칠기고배도 있으며 심지어 칼집과 칼끝장식, 부채자루에 쓰인 칠까지 다양하고 섬세한 쓰임을 엿볼 수 있다.
정한이 철의 생산지란 것은 「위지」의 기록으로도 확인돼 왔다. 그러나 그들이 BC1세기에 쇠도끼며 쇠괭이 등 농기구를 쓴 고도의 농업문화를 영위했다는 점은 정말 놀랍다. 거기에 다섯 자루 붓까지 나왔다.
쇠와 칠을 그만큼 세련되게 다룬 장인이 있고 문자생활을 하며 그만한 문물을 교류, 동원할 수 있는 집단이라면 그것은「국가」일수밖에 없다.
의창의 목관고분은 우리 고대국가형성사의 편년을 결정적으로 앞당기는 증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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