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겸손한 권력, 오만한 권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두 사람은 얼굴 근육이 떨리는 게 보일 정도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다퉜다. 그리고 이 총리는 바로 다음날 부산에서 기업인들과 골프를 쳤다. 이쯤 되니 여론의 제일 큰 관심은 "막무가내식인 이 총리가 이번엔 어떻게 나올까"하는 것이었다. "아예 무시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장 많았다. 이 총리는 그대로 갔다. 사퇴 전까지 이 총리의 사과는 네 번 있었지만 한 번도 흔쾌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만일 이 총리가 송구한 표정으로 "국민 여러분, 사려 없이 처신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 총리직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골프를 치지 않겠습니다"라고 사과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국민은 "어? 이 총리한테 저런 모습도 있었어?"하면서 탄복했을 가능성이 크다. 겸양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이는 강자에게 민심은 환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총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게 이해찬의 정치적.인간적 한계일 수도 있다.

# 2 몇 년 전 정치부 기자일 때 '이해찬 의원'과 골프를 친 적이 있다. 추운 겨울이었다. 정치인은 대부분 골프를 치면서 자기 홍보를 하기 바쁘다. 하지만 이 총리는 골프 자체에만 진지하게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이 총리의 성격은 '결벽'에 가깝다는 평가다. 검찰 수사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 총리가 기업인들로부터 이권을 받고 로비를 들어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 총리의 골프 파문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는 단어는 '오만'이다. 서울대 운동권으로서의 투옥과 도주, 정치권 입문과 5선의 경력,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을 잇따라 창출해 낸 일등공신, 그리고 광복 이후 가장 막강한 실세 총리. 이런 화려한 경력은 그가 세상을 우습게 생각하는 오만의 배경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오만은 주변에 감염된 흔적이 적지 않다. 총리실 출입기자들은 "총리가 데려온 사람들이 총리를 닮았다"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이 총리의 골프 파문이 터져나온 바로 그 주말에 이강진 공보수석은 천연스레 골프장에 갔다.

그는 "총리의 사생활은 내가 확인해줄 의무가 없다"면서 걸핏하면 기자들에게 면박을 줬다. 그래서 '권력화된 운동권'이란 비아냥도 나돌았다. 젊은 기자들조차 '이해찬과 그의 사람들'의 과거 운동 전력을 존중해주던 입장에서 점차 "뭐가 이래?"하는 식으로 실망해갔다. 민심도 그랬을 것이다.

실세 총리 이해찬의 성공과 좌절은 정치에 대한 변함 없는 진리 하나를 보여준다. "국민에게 겸손하라. 당신들의 권력은 거기서 나왔다."

김종혁 정책사회 데스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