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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꼬렌! 베트남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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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박스컵’이라고 불리던 ‘박 대통령 컵 쟁탈 축구대회’ 초창기, 박정희의 자존심을 긁은 나라는 미얀마(당시 국호는 버마)였다. 미얀마는 1971년 1회 대회부터 내리 세 해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첫 회 공동 우승했지만 이듬해 결승전에선 1-0으로 졌다. 다음 해 준결승에서 다시 만났지만 또 1-0으로 져 결승조차 나가지 못했다. 안방에서 잔칫상을 내준 박 대통령이 시상식 뒤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비록 아시아 무대에 국한되긴 했지만 60~70년대 동남아 축구는 약하지 않았다. 미얀마는 60년대 아시아 최강이었다. 태국·말레이시아도 한국의 발목을 번번이 잡았다. 71년 9월 가을비가 내리던 서울 동대문운동장. 뮌헨 올림픽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은 말레이시아에 0-1로 패해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일방적 공격을 퍼붓다 후반 ‘아마드’란 선수에게 역습 헤딩골을 당했다. 당시 인기 가요 ‘아마도 빗물이겠지’에 빗대 ‘아마드 빗물이겠지’란 농담이 유행했다.

동남아 축구가 나름대로 활약을 펼칠 때도 베트남의 존재감은 찾기 힘들었다. 분단과 전쟁, 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제대회 출전조차 버거웠다. 2000년대 들어 경제 형편이 나아지면서 투자를 늘렸지만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밑에서 세는 게 빠르다. 출전도 못하는 월드컵을 놓고 열기가 뜨겁지만, 사실은 만연한 도박 문화 때문이라는 조롱도 받는다.

이런 베트남 축구에 한국 지도자가 새 이정표를 세웠다.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대회에서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이라크를 극적으로 꺾고 사상 최초로 4강에 오르자 거리에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흔드는 ‘금성홍기’(베트남 국기)로 유튜브 화면이 온통 시뻘겋다. ‘파이팅’이란 뜻의 베트남어 ‘꼬렌!’ 연호도 뜨겁다. 우리 네티즌도 열렬한 댓글로 베트남을 축하하고 있다.

제3자의 눈에는 기적이지만 베트남으로선 노력의 결과다. 베트남 정부와 유수의 기업들은 2001년부터 유소년 축구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별 가망 없는 성인 축구보다는 어린 선수에 힘을 쏟았다. 현재 K리그 강원FC에서 활약하고 있는 ‘베트남의 박지성’ 쯔엉(22)이 이렇게 길러진 신세대 스타다. 지난해 7월 한국 K리그 올스타팀에 0-1 패배의 망신을 안겨준 베트남 대표팀도 23세 이하가 주축이었다. ‘어차피 메달권도 아닌데’ 하고 홀대했다면 오늘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23일 카타르와 준결승에서도 선전을 기대한다. 꼬렌, 베트남!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