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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이호철과 박종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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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이른바 ‘3철’의 맏이인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1987’의 박종철. 둘 다 이름 끝자가 ‘철’로 끝나는 것 말고도 연결고리가 있다. 이호철은 부마항쟁과 10·26 사태라는 역사적 인과(因果)의 중심에 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생이 참여한 유신 반대 가두시위에 화이트칼라·상인·고교생까지 합세해 8년 이르게 ‘87년 6월’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호철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자신이 주도한 부마항쟁이 비극적인 10·26 사태를 촉발하면서 잠시 고문을 면할 수 있었다.

이호철은 3년 뒤인 82년에는 부림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다시 ‘칠성판’을 탔다. 이번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만 갔다. 대신 박종철이 경계선을 넘었다.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이호철은 부산에서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다. 이호철은 “그때 고문받다 내가 죽었으면 박종철은 살아 있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지금도 한스러워한다. 그는 아직 영화 ‘1987’을 보지 않았다. 김근태의 영화 ‘남영동’도 마찬가지다. 고문의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어서다. 더 이상 아픔을 느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아팠던 나날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하는 표상 같은 것 말이다.

그에게 부산시장 출마 권유가 거셌다. 사실 이호철 정도의 민주화 운동 스펙이면 지금 정부에선 권력 2인자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최근 지지자들에게 당부한 말을 보면 전략가스럽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칼이나 총이 아닌 금속활자를 통해 이뤄졌다. 진보세력도 이젠 운동권 방식에서 벗어나 신기술을 찾자.”

부산시장 가상대결 여론조사 결과도 서병수 시장보다 높다. 못 이기는 척 출마 권유를 받아들여도 될 텐데… 달랐다.

이호철은 “두 번 죽을 뻔한 내 여분의 삶은 자유롭게”라고 말한다. “나의 재능 기부는 여기까지 (문재인 정부 출범)”라고 딱 선을 그었다.

불출마 선언문도 사실 지난해 10월에 이미 써놓았다. 내용의 일부다.

“많은 사람이 지방선거가 중요하고, 부산을 바꿔야 하고… 이길 수 있으니 마지막 봉사를 해달라고 합니다. 제가 노변, 문변에게 해왔던 말입니다. 제가 같은 말을 듣고 보니 두 분을 힘들게 한 죗값을 치르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정치를 버리는 실세를 한둘쯤 갖는 것, 괜찮은 실험 같기도 하다. 복당이다 뭐다, 중심을 잃고 옮겨다니는 여의도의 보따리장수들에게 경종이 될 수도 있겠다.

강민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