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과 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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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마천은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즐겼다.
강 언덕이나 해변에선 험난한 파도를 보며 담력을 길렀고, 첩첩산중에선 웅심을 키웠다.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선 역사의 명암을 목적할 수 있었다. 그는 여행을 통해 천하를 굽어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중국 최대의 사서로 불리는 사마천의 『사기』는 그런 오랜 견문의 축적과 대관의 안목, 그리고 커다란 도량이 담긴 저작이었다.
교육소설 『에밀』을 쓴 「루소」는 이 소설에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지식을 충분히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여행을 하려면 먼저 그 나라와 국민에 관한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느냐도 중요하다. 일찌기 출가를 했던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길을 떠나려거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나 비등한 사람과 일행이 되라. 아니면 홀로 떠나라』고 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산문이라면 여행은 시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때때로 시적인 감동을 통해 윤기를 더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 맑고 따뜻한 시간도 갖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기엔 우리의 나날들이 너무 무미건조하다.
「안데르센」은 그의 자숙전에서 여행은 자신의 정신을 젊게 해주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비로소 내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다. 누구나 여권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해야할 일은 또 하나 있다. 여행에 필요한 비자의 편의를 도모해 주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대사관에 비자를 한번 내보라. 어떤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한국인들을 도망 예비자쯤으로 보고 있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구하는 서류만 해도 기가 차다. 재직 증명서에 재산세 납부 증명서, 종합 소득세 및 갑근세 납부증명서, 은행잔고 증명서, 호적등본, 주민등록증 사본을 영문으로 번역해 제출해야 한다. 이것은 격식이 아니라 국민 모독의 문제다. 요즘 일본은 미국과 비자 없는 출입국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여기까진 바라지 않아도 우리는 수모나 당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문제의 해결 없는 해외여행 자유화는 거위에 접시물을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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