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님, 오늘 숙제했습니까" 대리기사 옥죄는 인삿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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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기사님, 오늘도 '숙제' 하셨어요?...'숙제' 안하면 콜 안보여

시내버스를 탄 한 대리기사가 휴대폰에 뜬 콜 배차를 보고 있다.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중앙포토]

시내버스를 탄 한 대리기사가 휴대폰에 뜬 콜 배차를 보고 있다.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중앙포토]

“기사님, 오늘 숙제하셨습니까?”
최근 대리운전 기사들끼리 하는 인사말이다. 여기서 ‘숙제’란 일정 콜과 금액을 채우는 것으로 대리업체 자체 규정이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좋은 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사 콜, 일정 횟수· 금액 넘어야 콜 배차 받는 구조 #대리업체 1~3위 업체, 자사 콜 선택기사 우선배차 #카카오 대리 출범, 기존 업체들 자체 규정 등 강화 #L사, 숙제 안하면 장거리 등 콜 배차 락 걸어 안보여 #대리기사협회 "비인간적 행위...숙제 우선배차 폐지" #전문가 "승객의 안전한 도착 위해 대리기사법 제정"

지난 12일 만난 대리기사 A씨도 ‘숙제’ 얘기를 잘 안다고 했다. A씨에 따르면 숙제는 평일인 월~목요일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2콜 또는 4만원 이상을 채워야 한다. 금요일에는 같은 시간 동안 3콜, 5만원 이상이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당일 콜 배차 내역을 볼 수 없다. 금요일 미달 시에는 주말 내내 콜 배차 내역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업체가 콜 배차 프로그램에 락(lock)을 걸기 때문이다. 하루에 많아야 5~6콜을 타는 대리기사 입장에서 단 1초만 놓쳐도 상업지역~상업지역, 장거리 등 '황금콜'을 못 잡는데 아예 콜을 못 보게 하는 것이다. 싼값의 콜이라도 타 숙제를 하는 실정이다. A씨는 “가정 형편상 투잡(two job)을 하는데 규정을 채우는 게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한 대리기사가 자신의 스마트폰에 뜬 콜을 보고 있다.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중앙포토]

한 대리기사가 자신의 스마트폰에 뜬 콜을 보고 있다.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중앙포토]

대리기사들이 ‘숙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업체들이 높은 수수료와 과도한 보험료 등을 떼 가는 것도 모자라 강제 규정까지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신속한 배차’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자사의 콜만 잡도록 하기 위해 대리기사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17일 대리기사들과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에 따르면 대리업체(콜센터)가 취객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관련 내용을 콜 배차 프로그램에 등록한다. 프로그램 운영사는 이를 기사들에게 공지하고, 기사들은 선택하면 된다. 콜센터는 등록만 할 뿐 기사 배정은 사실상 프로그램 운영사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콜센터는 신속히 배차해 주는 프로그램에 우선 등록한다. 한 건당 수수료가 20%여서 건수가 많을수록 이득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운영사는 많은 기사를 확보해야 실시간으로 배차해 줄 수 있다. 프로그램 운영사들이 기사들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숙제’와 ‘우선배차제’라는 규정을 두고 있는 이유다.

대리기사들의 월평균 수입과 지출구조. [저료 서울노동권익센터]

대리기사들의 월평균 수입과 지출구조. [저료 서울노동권익센터]

‘숙제’라는 규정을 둔 곳은 대리업계 1위인 L사다. L사는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업체다. 국내 대리기사가 8400여개 업체에 20여만 명인데, 이 중 80% 이상이 L사의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협회 측 설명이다. 문제는 이들 프로그램의 사용료가 월 1만5000원이라는 점이다. L사는 프로그램이 3개나 된다. 수도권을 권역으로 나눠 권역에 가까이 있는 기사들에게 우선 배차해 주고 있다.

서울 대리기사 분석 자료. [자료 서울노동권익센터]

서울 대리기사 분석 자료. [자료 서울노동권익센터]

L사가 이런 규정을 둔 것은 카카오가 대리운전 사업에 뛰어든 2015년 11월부터라고 한다. 카카오는 프로그램 사용료가 없기 때문에 기사들이 몰려서다. 또 ‘카카오 콜 이용 기사 우선배차제’를 운영하자 관련 규정을 강화했다는 게 협회 측 설명이다.

김종용 전국대리기사협회장은 “카카오의 운영 방침에 기존업체들이 따라 하면서 기사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며 “숙제라는 규정과 우선배차제는 비인간적인 규정인 만큼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L사 관계자는 “조건을 거는 경우도 있지만 두 콜 이상 등의 강제 조항은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도 “대리업체가 운용하는 것이라 우리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카카오 대리 관계자도 “우선배차제의 경우 서울과 경기지역에서만 운영된다”며 “카카오톡만을 사용하는 기사들이 상대적으로 콜을 덜 받을 것 같아 배려하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음주단속 중인 경찰관 모습. 대리운전 기사는 술에 취한 운전자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준다. 일부 외신에서는 '한국엔 유령이 있다. 술을 마시고 있으면 홀연히 찾아와 안전하게 집까지 차를 운전해주고 사라지는 유령이 있다'고 썼다. [중앙포토]

음주단속 중인 경찰관 모습. 대리운전 기사는 술에 취한 운전자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준다. 일부 외신에서는 '한국엔 유령이 있다. 술을 마시고 있으면 홀연히 찾아와 안전하게 집까지 차를 운전해주고 사라지는 유령이 있다'고 썼다. [중앙포토]

이 같은 문제로 대리운전업법안이 2016년 8월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계류 중인 상태다. 법안은 ‘과잉수수료나 부당이득금 부과, 특정보험 가입 강요 등 대리기사에게 부당이득을 취해서는 안 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주대 이철기 교통ITS대학원장은“대리업체가 기사확보를 위해 각종 규정을 두는 것은 어찌 보면 편법일 수 있으며, 자칫 신속하고 안전하게 귀가하고싶어하는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대리기사와 업체 간 갈등을 줄일 수 있는 관련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수원=임명수·김민욱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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