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흥과 멋(2) - 인간문화재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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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봉산탈춤」의 양소운씨
하도 장고가 치고 싶어서 어머니의 아끼는 농짝 하나를 부숴 놓고서야 부모님한테 가무수업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것이 불과 10세 소녀의 꿈이고 그때 이미 타고난 재주를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로부터 외길 50여년.
「봉산탈춤」의 예능 보유자 양소운여사(64·인천)는 1967년 이 탈춤이 중요 무형문화재 17호로 지정될 당시 네 사람 중 가장 나이 젊은 43세였지만 빠질 수 없는 재롱덩이였고 연로했던 세분이 다 세상을 떠난 오늘날엔 말할 것도 없이 봉산패거리의 주축 멤버의 한사람이다.
못하는 춤사위가 없고, 못하는 소리도 없다.
지금 맡고있는 배역만도 제 1요장의 상좌, 3과장의 사당가무, 7과장의 미얄할미 등 여역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다.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놀이판에선 무슨 재주든 다 필요한데 양여사는 그런 탈판을 위해 태어난 듯 싶다.
그 온갖 재주를 귀찮다 하지 않고 신명이 나서 다 해낸 것이다.

< "팔자 소관인가봐" >
미얄춤만 하더라도 그렇다.
세상 풍파에 시달려 반점투성이로 검붉게 쪼그라진 얼굴(탈)의 할미가 온통 허리를 드러낸채 엉덩춤을 추며 부채와 방울을 흔들어대는 유별난 장면이다.
엉덩이를 잔뜩 빼고 잦은 굿거리 가락에 춤추기란 여간 거북하고 힘든 몸짓이 아닌데 노인답지 않게 지금도 펄펄난다.
『한창때는 중천에 떠서 논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뛰다가 금새 모사를 하려면 숨이 턱에 차는 것을 용케도 잘해냈다.
『좀 쉬고 싶어도 안돼요. 내가 죽어지면 그 작품이 그냥 없어질 것인데 후배에게 전수해 주어야죠. 모두 선생님한테 배운 것이라서 좀 귀찮다고 그걸 혼자 땅속까지 갖고 갈 수는 없고, 그러자니 쉴날이 없어요』
월요일은 으례 봉산탈춤의 전수회관에 나가고, 수요일과 금요일은 서울에 있는 김기수 탈춤 연구원에 초빙되어 지도를 한다.
그리고 목요일은 인천시 문화회관에서 해주 검무를 가르친다.
손수 장고를 잡고 앉아 주부 지망생들을 상대로 춤사위와 손놀림을 일일이 교정해준다.
「해주 검무」와 「승인인승무」는 아직 무형문화재 지정을 못 받았지만 지정 여부와는 관계없이 전수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뜻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보유자들과는 생활방식이 다를밖에 없다.
노년을 유유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1주일내내 종종걸음으로 서울과 인천을 오르내리기 바쁘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자가용승용차로 모시는 형편도 아니다.
인천내동의 언덕배기에 있는 10간 남짓한 한옥으로 자족할 따름이다.
『그게 팔자소관이란 거죠. 좀이 쑤셔서 앉아 있질 못해요. 스무살 때 결혼하고서 1년간 못한적이 있는데, 노니까 죽도록 앓게 돼서 그만 시어머니와 애 아버지가 할수 없노라고 허락 해줬지요』
두번째 관문을 어렵게 던 시절의 회고담이다.
양여사는 어려서부터 탈놀이를 구경했고 11세때 갑자기 「봉산탈춤」에 끼어들게 되었다.
마침 해주에 와서 공연하던 봉산 탈꾼의 한 사람이 사고가나 응급 대역으로 물색되었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대회에서 봉산이 1등을 해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 응급 대역이 인연>
황해도의 탈춤놀이는 단오에 닷새썩 벌어졌다.
도내의 대소도시마다 제각기 탈춤 패거리가 있어 서로 우열을 다투듯 열광적이었다.
북쪽으론 사리원·봉산·황주·재령·은율 등지와 동남으로 신원·서흥·평산·신막 등지가 있고 남쪽해안으로 해주·강상·금산·연백 등 유난스러울 이만큼 해서저점에 분포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북으로는 대동강을 넘지 않았고, 남으로는 서울 인근의 산대놀이와도 다른 홍을 지닌 것이 특징이었다.
그 중에도 지난 1백년동안 해서 가면극의 정상을 차지해온 것이 봉산이어서 말하자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점에서는 해서 사람들이 일찍 개명했던것 같다.
중국과의 사항이 빈번한 통로이고 영접행사로서의 탈판은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이다.
들녘의 곡식과 산에서 나는 자원이 풍족한 편이어서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한 고장이고,바다를 통한 무역도 새시대의 풍조를 쉽게 접할수 있게 했던 것 같다.
봉산탈춤의 내용이 그러하듯이 해서 탈춤의 공통된 특징은 노장요양에서 도덕적으로 허위투성인 자들을 무참하게 비판하고, 양반과장에서는 신분적인 특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비판한다.
그리고 미얄과장을 통하여 민중의 살아가는 방식, 웃음과 눈물, 특히 남성의 횡포를 여지없이 비판한다.
사회 저변의 이 3가지 히위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구습의 컹산과 근대사회에의 발돋움을 표현한 것이 바로 탈츰의 구성요건이다.
그러면서 그 하나하나의 요양은 주제상의 통일성을 지니면서도 이야기의 줄거리는 독립적이다.
옛날에는 저녁 무렵부터 자정까지 무려 6시간씩 놀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현대의 연극처럼 하나의 줄거리로 이끌어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 지루한 전개를 관객은 원치 않는다.
탈꾼도 구경꾼도 같은 민중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사회적인 처지를 주제로 삼은 여러 측면의 얘깃거리를 예시하듯 몇 과장을 잇대면 될 뿐이다.

< 춤고장 해주서자라 >
또한 그 자리에서 민중을 울릴 이유도 없다.
비참한 결과에 이르고도 기분좋게 춤을 춘다.
통쾌하게 공감하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비록 비극적인 원천에서 빚어진 소재라 할지라도 희극적으로 처리한 점에 탈놀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철저한 비판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탈춤은 현실의 반영이면서 현실의 연장감을 주며, 또 구경꾼들은 제3자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당사자로서 현실의 배판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탈놀이가 끝나면 뒤풀이가 동틀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니까 탈꾼과 관객 사이에 잔뜩 상기되었던 신명을 풀기 위해 서로 어우러져 춤추며 노래하는 여흥이다.
일치감의 재확인이요 공동체 의식의 발로이라 할까. 뒤풀이에는 무슨 격식이 있을 수 없었다.
양여사는 그같이 노래하며 춤추는 고장에서 자랐다.
본시 재영에서 태어났지만 해주에서 성장기를 보내면서 정례 소학교를다닐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스름 길에서 『낙양동천이화정』하고 외치기를 곧잘 하였다.
그 외침은 팔목중이 악사에게 강단을 지시하는 발림(신호) 이다.
집에서 대문늘 열어제치고 들어서며 낙양동천…을 외쳤다고 어른들에게 되게 호통을 받은걱도 있었다.
누가 말린다고 해서 그 소리가 입안에서 가셔지는 건 아니었다.
더욱 난처해진 일은 늘 장고소리가 나는 대갓집이 학교길목에 있었다.
돈있는 가정에서 애들에게 예능을 익히게 하는 과외수업 같은것인데 그에 매료된 나머지 한번은 당돌하게 들어가서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물론 가난한 처지의 소녀를 그들 사이에 끼워줄리 만무한 일. 소녀는 들창 너머에 기대서서 장고 장단을 재주껏 터득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연필을 가지고 도드락탁 책상을 치는 습관이 생겨 공부시간에 선생님한테 꾸지람도 많이 들었고 연필마다 심이 곯아 성한게 없었다.
손에 나무꾜캥이만 잡히면 길에서 한바탕씩 전주라도 쳐야 후련했다.
담임선생이 집으로 찾아와 실성한 것이 아닌가 상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일편단심 장고에 골똘한 꿈은 어쩌는 수가 없었다.
틈만 나면 어머니의 자그마한 2층 농짝을 싸리채로 장고치듯 두드려 끝내 옆널을 부숴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아버지와 오빠가 장고 선생과 상담하고 『그게 어떤 고명딸인데…』하시던 어머니조차 동의하게 돼 손수 장고를 사주셨다.

< 해외공연 도맡아 >
더구나 이웃 정미소집 노인께서 수양딸을 삼아 뒷바라지를 해주기로 해서 일은 선선히 풀렸다.
그때 선생님이 경기 해서 일원에서 명성 높았던 교사 장량선씨.
그분 밑에서 장고와 춤을 4년간 배운 뒤 서도소리는 김진매·양이천 두분한테 배우고 따로 문창기 선생으로부터 배뱅이굿을 익혔다.
꺾어내리는 소리가 특징인 서도 소리는 12창인데, 그 일부가 봉산탈춤에서 요긴하게 쓰임은 물론이다.
봉산탈춤이 서울에서 재연된 것은 1961년. 마침 봉산출신의 사업가가 칭량리밖에 극장을 지으면서 개봉공연으로 탈춤을 무대에 올리기로 제안한 것이다.
그때 김신옥·민간식 같은 고참자들이 생존했을 때여서 노련한 탈꾼들이 향수에 젖어 모여들었다.
그때부터 탈춤의 열기가 불붙어 67년에 국가적인 보호대상이 되였고, 77년 이후에는 봉산탈춤이 우리나라 가면극의 대표적인양 해외공연을 도맡다시피 했다.
맨처음 하버드 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의 20개 대학에서 공연을 했고 그동안 일본·대만·캐나다·유럽 등 거의 매년 나들이를 해왔다.
『젊어서 소리 배울 때는 날마다 새벽 3시에 수양산으로 갔어요. 광석계 폭포수 밑에서 연습해도 하나도 무섭다는 생각이 안 났어요. 또 춤 선생님이 큰절에 제가 든 것을 알고 춤따오라고 날 혼자 보냈는데 참 겁도 없었지요. 밤새도록 지켜보아 두었다가 바라 돌리는 모습과 손놀림 등 본대로 시연하면 선생님이 대견하다고 칭찬해주었지요』
71년과 72년도엔 국립극장에서 4시간에 걸친 서도소리 발표회를 가진바 있다.
몸이 아플때도 무대에 나서기만 하면 힘이 샘솟는다고 했다.
요즘 인천 문화회관에서의 검무교습도 스폰서가 있다든가 수강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그런 고달픔이 도리어 삶의 즐거움이요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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