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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내주고 밥당번 … 녹번동 ‘유기견 공동돌봄’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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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서울 은평구 녹번동 빌라촌에 뚜치 등 유기견 6마리가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모여 산다. 포획되더라도 입양되지 못하고 대부분 안락사를 당하는 유기견들을 보호하기 위한 ‘공동 돌봄’이다. [홍지유 기자]

서울 은평구 녹번동 빌라촌에 뚜치 등 유기견 6마리가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모여 산다. 포획되더라도 입양되지 못하고 대부분 안락사를 당하는 유기견들을 보호하기 위한 ‘공동 돌봄’이다. [홍지유 기자]

15일 오전 11시, 북한산 자락인 서울 녹번동 독바위 공원 근처를 지나려니 빌라 건물들 사이로 2∼3인용 텐트 2동이 눈에 띄었다.

입양 적고 대부분 포획 후 안락사 #주민들이 나서서 십시일반 돌봐 #반려견 삼기 힘든 상황서 대안으로 #일각 “떼지어 다니는 개들 위협적”

얼핏 노숙인들이 머무르는 듯 보였다. 텐트 가까이 가자 흰색 개 몇 마리가 그 안을 드나들며 어울리고 있었다. 이 빌라 주민인 허은영(47·여)씨는 “주민 10여 명이 마련한 ‘유기견 보금자리’”라고 설명했다.

이 ‘보금자리’가 생긴 건 지난해 7월 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허씨는 전기 올가미에 묶인 유기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올가미 탓에 목과 가슴 부위에 손바닥 한 뼘 길이의 상처가 났고, 거기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어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동물단체가 포획해 올가미를 제거했지만 겨드랑이 근육이 크게 상한 상태였다. 주민들은 이 유기견을 위해 치료비를 모아 완쾌시켰다. 그리고 이름을 ‘뚜치’라고 지었다. 녹번동 주민들과 유기견의 동거가 시작됐다.

일부 주민은 사료비를 대고 텐트를 기부했다. 이후 뚜치는 새끼 2마리를 낳았고, 다른 유기견 3마리가 합류했다. 한 집주인은 비나 눈이 오면 들어올 수 있도록 주차장을 유기견들에게 내놓았다. 돌아가며 ‘밥 당번’을 서기도 한다.

최근 주민 20여 명은 유기견 포획 반대 성명서를 모아 서울시청과 은평구청에 제출했다. 뚜치의 이야기를 실은 ‘우리 동네 개들 이야기’ 홈페이지에는 1000명이 넘는 시민이 포획 반대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뚜치와 같은 유기견을 보는 시각은 곱지만은 않다. 현행법상으로는 야생화된 유기견이라도 포획틀로 생포해 입양할 기회를 준다. 하지만 ‘들개’를 선뜻 입양할 사람은 없고, 대부분 포획되면 안락사당하는 처지가 된다. 산속에 떼로 무리지어 다니며 탐방객에게 공포심을 주는 야생화된 유기견들은 총으로 즉시 쏴 죽여 개체수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녹번동의 개들도 이와 같은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녹번동 주민 김모(65)씨는 “이 거리를 지나다니면 몇 마리의 개가 한꺼번에 짖어 움찔하게 된다”며 “ 개를 집에 들이지 않고 길가에 풀어 키우는 것은 민폐”라고 말했다. 신민상 은평구청 생활경제과 주무관은 “녹번동에 새로 이사온 주민들과 등산객들, 인근 어린이집 등에서 민원이 들어왔다”며 “개들이 길거리에 떼지어 사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주민이 신고한다면 잡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초 인근 동네 주민의 신고로 다섯 마리가 포획돼 보호소로 보내지는 일이 있었다. 서울 시내 야생 유기견 개체 수는 지난해 초 100마리에서 1년 사이 170여 마리로 늘었다. 이 중 약 60%가 북한산이 있는 은평구에 밀집해 있는 것으로 시는 추정하고 있다.

유기견 대책과 관련해 대부분의 동물보호단체는 중성화 수술(번식 억제)과 동물등록제(유기 방지)를 해결책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이미 버려져 야생화된 개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KARA)의 전진경 이사는 녹번동 주민들의 공동 돌봄이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야생화된 유기견 대부분은 포획당한 뒤 일정 시간 보호소에 머물다 안락사를 당한다”며 “반려견이 될 수 없다면 그 차선책으로 공동 돌봄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라와 성서대 사회복지학과는 녹번동의 사례를 바탕으로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에 소규모 들개 쉼터를 만들 예정이다. 사람을 따르는 일부에 한해 중성화 수술을 시킨 뒤 주민들이 공동으로 돌보겠다는 취지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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