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허구적 이념논쟁은 이제 그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정치의 계절에 활기를 띠는 것은 이념 논쟁이다. 벌써부터 상대 이념에 대한 집요한 비판과 거친 공격이 이뤄진다. 자기 세력의 대동단결도 호소한다. 혹자는 탈냉전 시대에 이념 대립이 치열해지는 것을 의아해할지 모른다. 선동에 가까운 언설을 보면 과도한 이념논쟁이 가져올 폐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정치가 발전하면 이념논쟁이 활발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념은 정치적 목표를 가늠하는 사고의 기본틀이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탈(脫)이념을 강화하더라도 상당기간 이념과 탈이념은 공존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념대립이 사실과 허구 중 어디에 기초하느냐에 있다. 이념에 가치판단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사실판단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좌파 정부라는 주장은 하나의 사례다. 좌파 정부라 하면 시장보다는 국가를, 생산보다는 분배를 강조해야 하거늘 법인세 인하, 중소기업 혁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모색하는 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있는 사실을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은 허구적 이념대립을 만들어 정치적 반사이익을 취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다. 자신들은 변화하는데 상대방은 여전히 수구우파 또는 수구좌파에 머물러 있다고 몰아붙이는 태도도 문제다. 민주화와 더불어 최근 우리 정치세력들은 자신의 이념을 강령에 담아 왔다. 한나라당의 '공동체 자유주의', 열린우리당의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민주노동당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는 현재 보수.중도.진보의 이념을 대변한다.

최근 강령과 현실정치의 거리는 갈수록 좁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열린우리당이 주도한 사학법 개정이나 한나라당이 제안한 전자팔찌제도,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법안 거부는 자신의 강령에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보수든 중도든 진보든 최근 우리 이념은 진화과정에 놓여 있는 셈이다.

다양한 싱크탱크 그룹의 등장은 또 다른 사례다. 지난해 뉴라이트에 이어 올해는 개혁과 진보세력의 새로운 대안 및 정책을 모색하는 그룹들이 속속 출범해 왔다. 또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국민대통합연석회의에 경총.전경련 등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념의 자기 혁신은 쉽지 않은 과제다. 그러나 변화하려는 꾸준한 시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변화에는 관대하고 상대의 변화에는 인색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가 분배를 말하고 개혁과 진보가 성장을 주목하는 자체가 결코 작지 않은 변화다. 더불어 부분으로 전체를 과장해서도 안 된다. 한.미동맹을 강조한다고 해서 무조건 수구우파로, 북한인권을 사려 깊게 접근하자고 해서 수구좌파로 볼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의 이념대립은 복합구도를 이루고 있다. 시장친화적 정책에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협력하며, 복지를 강화하려는 정책에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공조하고 있다. 이념은 선동의 수단이라기보다 정책의 차이를 설명하는 세계관에로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결론을 맺자. 허구적 이념대립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자. 정치가 아무리 '적과 동지의 이분법'이라 하더라도 이념논쟁은 사실에 기반해 콘텐트를 갖추고 하자. 내년이면 민주화가 이뤄진 지 20년이 된다. 20년에 걸맞은 품격과 내용을 갖춘 이념논쟁이 진행되길 기대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