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건강철학(10)|이시형(고려병원·신경정신과장)|위대한 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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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만고에 높은자리 동생에게 사양하고. 양령대군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세자에 책봉된후 그의 기행과 실수는 완전히 미친 것 이었다.끝내는 폐위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른다. 야사에 의하면, 그는 자신보다 영특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기위해 일부러 미친체 했다고 한다. 그의 마음속엔 참으로 깊은뜻 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괴로웠을 것이다.그는 심하게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위대한 고통이요,위대한 법이었다.
이건 아무나 걸리는 병도 아니다. 누구나 쉽게 앓을 수 있는것도 아니다. 큰 인물들이 겪어야하는 위대한 법인 것이다. 우리의 근세사에도 일제하의 지식층들이 이병을 앓았다. 그들의 깊은갈등과 고통은 여러가지 법적 상태로 나타났다.
때론 미친사람 처럼 절규하고, 때론 자조의 깊은 늪으로 빠지기도 했다. 술로,방탕으로,그리고 정처없는 방황으로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이름없이 향리에 묻혀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우울과 실의속에 바보처럼 방구석에 처박혀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얼른 보기엔 백수 건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이렇게 나마 달래야했던 것이다.이것도 일제에 항거하는 표현이었다.내재된 강렬한힘,울분과 항거의 절규는 그들이 남긴 시에서, 그림에서, 소설에서, 강하게 읽을 수 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수주선생은 이렇게 논개를 읊었다. 술과 기행과 해학속에 온갖실수로 점절된 「명정 절년」이었다. 선생 역시 앓고 있었다. 앓아도 크게 앓았다. 그런중에 그의 신음소리가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있었던 것이다.
앓아야한다. 앓아야합 까닭이 있는 사람은 앓아야한다. 밤을 지새고 머리를 치며 괴로와 해야한다. 그게 사람다운 삶의 참 모습이다.
일제하에 앓지 않은 지성이 있었다면 그건 썩은 삶이다. 아파야할 사람이 아프지않다는건 정말 큰 문제다. 사람들은 약아서 편한것만 찾으려 한다. 작은고통도 그저 피하려고만 한다.
아픈걸 범석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그보다더 큰 고통이 따라오고 있는데도 우선 눈앞의 작은아픔을 피하기에 급급하고있다.
그래도 소수의 괴로운 양심들이 있어 어두운 우리사회의 등불이 되어봤었다.
참 다행이다.돌이켜보면 말이 해방이지 1인 독재의 숨막힐듯한 탄압속에 살아야했다.우리는 앓았다. 크게 앓았다. 그 고통이 응집되어 끝내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지 않았던가.요즈음온 나라엔 새로운 기운이 소생되고 있다. 이건 많은사람들이 그만큼 깊이 앓고, 또 괴로와했던 때문이다. 값진 고통의 산물이었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병자 였던 것이다.
이건 고통의 승리였다. 피하거나 가법게 앓아서 없어질수 있는게 아니다. 아파야할적엔 크게 아파야 한다.아픈걸 피하는게 동물의 본능이긴 하지만 그래도 위대한 병은 앓아야 거기서 얻어지는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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