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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복잡해도 너무 복잡, 차라리 검정고시 보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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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입시에 지친 고교생들 “자퇴하고 검정고시 볼래요”

수시와 정시로 나뉜 복잡한 대학 입시, 새 교육과정 도입과 수능 개편 등 잇따른 교육 변화에 불안함과 피로감을 느낀 학생 · 학부모들 가운데 고교 자퇴 후 검정고시로 대학 진학을 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 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수시와 정시로 나뉜 복잡한 대학 입시, 새 교육과정 도입과 수능 개편 등 잇따른 교육 변화에 불안함과 피로감을 느낀 학생 · 학부모들 가운데 고교 자퇴 후 검정고시로 대학 진학을 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 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고3, 중3 자녀를 둔 학부모 김은정(45·서울 송파구)씨는 지난주 겨울방학을 맞은 둘째와 함께 검정고시 학원을 둘러봤다. 김씨의 둘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교에 진학하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학생·학부모 "고교 학점제, 내신 절대평가 등 #지금도 복잡한데 계속 바뀐다는 얘기뿐" #자퇴생들 "수시 포기하고 수능에만 올인할 터" #대입 관계자들 "불리하고도 위험한 선택"

김씨는 “온 가족이 상의한 끝에 둘째는 고교 진학 대신 검정고시를 봐서 고졸 학력을 취득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둘째는 올해는 고졸 검정고시에 집중하고, 이후 2년간 수능 공부에 매진한 뒤 수능 성적만으로 대학 합격자를 뽑는 정시전형에 지원할 계획이다.

김씨 가족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올해 치른 첫째의 대입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김씨는 “큰애의 성적이 상위권이었는데, 고3 1학기 때 한 차례 크게 아파서 중간고사를 망쳤다. 결국 이를 만회하지 못해 수시전형에서 원하는 대학에 붙지 못하고 정시에 지원한 상태”라 말했다. 그는 “차라리 고1 때부터 내신에 신경쓰지 않고 수능 준비에만 집중했다면 입시 결과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둘째의 고교 진학을 포기한 데는 교육 제도가 자주 바뀌는 것도 한몫했다. 김씨는 "고교 학점제를 도입한다는 둥, 수능이나 내신이 절대평가로 바뀐다는 둥 온통 '교육이 바뀐다'는 얘기뿐”이라며 “둘째는 큰애보다 성적도 뒤처지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 이런저런 변화에 휩쓸려 집중력을 잃을까도 걱정된다”며 ”차라리 일찍부터 수능에만 집중시키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고교생이나 이들 학부모 가운데 ‘고교 자퇴’를 놓고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수험생 온라인 커뮤니티 '수만휘' '오르비' 등에는 자퇴와 검정고시 관련 문의가 잇따른다. ‘검정고시는 대학 진학 시에 불리한 점이 있느냐’ ‘검정고시 출신도 의대에 진학할 수 있느냐’는 질문 등이다. 댓글에는 ‘정시전형에서는 검정고시에 대한 차별이 없다. 의대 진학도 가능하다’며 응원하는 내용이 속속 올라온다.

실제로 딸이 고교 1학년 과정만 마치고 자퇴한 뒤 검정고시에 응시해 지난해 고려대에 입학한 박모(47·경기도 안양시)씨는 “주변에서 검정고시에 대해 많이 문의하는데, 아이의 의지만 분명하다면 도전해보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박씨의 딸은 고교에 입학한 뒤 내신시험이나 교내대회를 앞두면 위경련과 장염에 걸릴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박씨는 "아이가 고3까지 계속 고생할 바에야 차라리 고교를 그만두고 수능 하나만 준비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박씨의 딸은 자퇴한 뒤, 고졸 검정고시를 한 번에 붙고 재수 종합학원에 들어가 이듬해 수능을 치렀다. 수능 성적은 국어·수학·영어 모두 1등급을 받았다.

그간 검정고시는 제때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만학도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제도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학교까지 별문제 없이 졸업한 평범한 학생들이 대입 전략으로 검정고시를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교 자퇴 후 검정고시로 선회하려는 이들은 "현행 대학 입시가 수시전형과 정시전형으로 나뉘어 가짓수도 많고 난맥상"이라고 지적한다. 다양한 입시 전형에 대비하자면 고교 내신, 비교과, 수능 등을 모두 잘 챙겨야 한다는 의미다.

고교 자퇴를 택하면 내신·비교과 등 학교 생활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 '수능 하나만 잘 준비해 정시모집만 노리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전국 대학에서 수시전형과 정시전형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비중은 7대 3 정도다.

[수험생 인터넷 커뮤니티]

[수험생 인터넷 커뮤니티]

여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교육정책도 학생·학부모의 불안감과 피로감을 더했다. 당장 올해 고1부터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돼 교과서가 바뀐다. 통합과학·통합사회 등 문·이과 학생이 모두 배워야 하는 과목도 새로 생겼다. 고교 학점제, 내신 성취평가제 도입에 대한 얘기도 오간다. 학부모들은 “교육 정책이 한꺼번에 너무 여러가지가 바뀌는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학부모 김씨는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싫다. 그래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검정고시와 수능에만 집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지난달 헌법재판소는 '교대가 수시모집에서 학생부 제출을 의무화해 학생부가 없는 검정고시 출신의 지원을 제한해온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현재 교대 외에도 일부 대학에서 검정고시 출신의 수시모집 지원을 제한하고 있다. 이번 판결로 검정고시 출신이 대입 수시전형에 지원할 기회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8월 초졸-중졸-고졸 졸업학력 검정고시가 실시된 서울 용산구 용강중학교에서 검정고시에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8월 초졸-중졸-고졸 졸업학력 검정고시가 실시된 서울 용산구 용강중학교에서 검정고시에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그간 검정고시 출신이 주로 지원한 정시전형은 전체 선발 인원의 30%에 불과했는데, 수시전형 지원 기회가 늘어나면 고교생 중에서 내신이 나쁜 학생 중 상당수가 자퇴를 고민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입시 전문가들은 대입을 위해 검정고시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불리하고 위험한 전략”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진택 경희대 입학사정관은 “대학은 고교 교육과정을 성실하게 이수한 학생을 가장 선호한다”며 “단지 입시만을 위해 검정고시를 택하는 것은 입시 전략으로도, 교육적 효과 면에서도 절대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임 사정관은 "고교 재학생들이 ‘내신 관리에 대한 부담’을 이유로 자퇴를 고려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입 제도를 잘 몰라 생긴 오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학생부종합전형의 경우 전 과목, 전 학년의 내신 성적을 보는 게 아니다”라며 “상당수 대학이 지원 학과와 관련 깊은 과목 위주로 가장 잘 나온 학기의 성적을 중요하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교 시절 성적이 한두 차례 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자퇴를 결심하는 건 지나치게 섣부른 결정”이라고 조언했다.

김혜남 문일고 진학부장도 “고교 교육과정을 건너뛰고 검정고시와 수능에만 전념하는 것은 대입뿐 아니라 미래 사회를 살아갈 경쟁력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올 고1부터 적용되는 2015 개정교육과정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역량인 협업과 융합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검정고시와 수능에 올인하면 미래 역량과 상반되는 반복 학습과 암기에만 매진하게 될 뿐”이라고 우려했다.

오종운 종로학원하늘교육 평가이사는 “대입에서 70%를 차지하는 수시전형은 재수생이나 검정고시생보다 고교 재학생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며 “대입에 가장 유리한 ‘고교 재학생’의 위치를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선택하는 것은 넓은 길을 포기하고 굳이 좁고 험한 길을 선택하는 격”이라 비유했다.

이영덕 소장도 “향후 수능이 절대평가로 바뀔 가능성이 높은데, 이렇게 되면 대입에서 수능의 영향력이 현저히 약해지면 대학들은 ‘정시전형 무용론(無用論)’을 제기할 것"이라 내다봤다. 그러면서 "대학들이 정시전형에도 수능 성적뿐 아니라 면접·논술·교과 내신 성적 등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되면 검정고시 출신은 더욱 좁아진 정시전형을 뚫기 위해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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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교원단체인 한국교총의 김재철 대변인은 “정부는 잦은 입시 변화와 이에 따른 혼란으로 학생·학부모의 불안이 가중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교육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대입 제도 변경의 속도를 늦추고, 불필요한 혼란을 줄여달라”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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