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하찮은 것을 위한 … 그래서 눈물겨운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시인 이정록(42)의 다섯 번째 시집 '의자'(문학과지성사)를 읽었다. 예의 그 이정록의 시였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시재(詩材), 하찮고 사소한 것에 대한 지순한 애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넉넉한 시선까지. 소리내 읽으면 감치고 속으로 읊으면 녹진하다. 그러나 새롭지는 않다. 능청맞은 충청도 입담이 변덕스런 요즘 입맛에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권한다. 언젠가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어서 시가 펜을 놓아줄 때까지 고친다" 했던 시인의 고백을 기억하기 때문이고 베개 밑에다 노트와 볼펜을 넣고 자는 사람이라는 소문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선 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뚝뚝 묻어나기 때문이며 몇몇 시, 충청도 어미의 투박한 말투 빌린 몇몇 시 눈물 참으며 읽었기 때문이다.

'내 손톱 밑을 거쳐 간/흙을 다 모으면//느이 이가네 논밭/한 해 객토(客土)는 거뜬할 겨//반백 년을/이 집서 살었는디//이 에미는/워째 손님만 같다냐//이러다,/느이 종중 산에 객토할라'-'손님' 부분

'허리가 아프니까/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꽃도 열매도, 그게 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주말엔/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그래도 큰애 네가/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싸우지 말고 살아라/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의자' 부분

굳이 요란스럽지 않아도 시다. '편지를 멀리한다 싶어 편지 봉투 한 꾸러미 사놨더니 편지는 쓰지 않고 부의 봉투로 다 써버렸다'('겉봉에만 쓰는 편지'에서 인용)고 묵묵히 적어도 시다. 굳이 천 리 타향 떠돌지 않아도 시다. 자장면 빈 그릇 덮은 신문지 바라보며 '밀려난 것끼리는 궁합이 잘 맞는다'('나무젓가락의 목덜미는 길고 희다' 부분)고 담담히 말해도 시다. 곱디고운, 하여 귀하디 귀한 시다.

때로는 말이다. 시인 유용주의 말마따나, 멸치 몇 마리와 무 한두 조각 넣고 끓여낸 맑은 국이 기름진 고깃국보다 맛있는 법이다. 신파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시인 이정록의 하고많은 꿈 중 하나가 '어깨 처진 사람들의 등줄기나 사타구니에 왕겨 한 줌 집어넣는 것'('좋은 술집' 부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