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가르치는 '거지 왕초'… 학력 인정 노숙자 자활학교 건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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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노숙자 출신 학생들이 환한 표정으로 정병훈 이사장의 강의를 듣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한다고 '거지 왕초'로도 불려요. 하지만 그들이 변화된 모습으로 학교를 나서는 것을 보면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2002년 6월 전남 광양시 옥룡면에 노숙자들을 위한 자활학교 '거광정보교'를 연 정병훈(57) 이사장은 요즘 감회가 새롭다. 평생교육시설로 문을 연 이 학교가 최근 전남도교육청에 의해 학력인정학교가 됐기 때문이다. 18일 거광중.고교로 이름을 바꿔 중학교 1개반과 고교 1개반 등 모두 80명의 신입생을 받는다.

그간 이곳에 학생으로 입학했던 노숙자는 3500여 명.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퇴교할 수 있어 10번까지 드나든 사람도 있다.

학교 측은 이들 중 300여 명은 거리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직장을 구해 자활에 성공한 것으로 추산한다. 정 이사장은 이 학교를 거쳐간 사람들에겐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숙자였던 과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들에 대한 배려에서란다.

정 이사장은 광주교대를 나와 교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고향인 광양에서 5년간 교사를 하다 1975년 경찰에 투신했다. 태권도 공인 5단인 그는 청와대 특별경호대에 근무하던 중 10.26을 현장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 충격으로 한동안 방황하다 신학에 빠져 서울 중부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재직하던 8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91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그동안 저축한 돈과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 등을 처분해 신학교인 독립문총신대를 세우고 총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신학교 수양관을 짓기 위해 광양 백운산 중턱에 부지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이 부지엔 수양관 대신 노숙자 학교가 세워졌다. 98년 아는 목사 한 분이 서울역에서 기거하던 노숙자를 돌봐달라며 데려온 게 계기였다.

"비참하게 생활하는 노숙자들에겐 빵 한 조각보다 자활 의지를 심어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느꼈지요."

정 이사장은 서울역.대학로.남산 등에서 노숙하는 이들을 학교로 이끌었다. 10대 후반부터 70대 초반까지 남자면 누구나 받았다. 그 대신 학교에 들어오면 술을 끊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했다. 인근 학교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기증받아 이들을 가르쳤다.

4명씩 조를 이뤄 공동생활을 하도록 했고, 당번제로 밥도 짓게 했다. 자원봉사에도 참여토록 유도했다. 올 1월 호남에 폭설이 내렸을 때 함평의 농가를 찾아 무너진 축사를 치우는 일을 돕도록 했다. 정 이사장은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구나'란 생각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했다.

2002년 개교 당시부터 이곳에서 생활해온 이일만(53)씨는 "남을 위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됐다"며 "노숙자를 위한 전도사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2년 동안 학교에 머문 박모(40)씨는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다"며 "고교과정에 진학해 공부하면서 진로를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이 학교 출신인 황예성(68)씨는 신학교에 진학해 최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월 2500만~3000만원에 이르는 경비는 정 이사장이 내놓은 사재와 후원금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 이 학교에는 교사 8명 등 교직원이 11명이고, 4000여평의 부지에 교실과 강당.기숙사 등 5개동이 있다. 하루 8시간 학과 공부가 진행되며 방학없이 2년제로 운영된다.

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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