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 5년만에 ‘무제한 돈풀기’중단…“금리로 통화조절”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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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행이 ‘양적완화정책’을 중단한 9일 도쿄증시에선 금리 인상에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는 안도감에 주가가 큰 폭으로 올랐다. 이날 닛케이지수는 전날보다 409.42엔(2.62%) 상승한 1만6036.91엔을 기록했다. [도쿄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은 디플레이션에서 완전 탈출했다. 돈을 무제한 푸는 것은 그만두고 이젠 물가 상승을 봐가며 금리를 조절하겠다'.

진통 끝에 나온 일본은행의 새로운 통화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쓰자면 '양적완화 정책의 해제'다. 일본은행이 시중은행을 통해 무제한 통화를 공급해 오던 '양적완화'를 거둬들이겠다는 뜻이다. 경기회복을 공식적으로, 그것도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셈이다. 일본이 2001년 3월 부실 채권에 대한 우려와 디플레 극복을 위해 도입한 '양적완화'는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통화정책을 금리로 조절하는 게 아니라 중앙은행이 시중에 푸는 자금 규모로 조절한 것이다.

즉 시중은행들의 자금 규모를 표시해 주는 일본은행 당좌예금의 잔액 규모를 법정 적립금보다 훨씬 높게 책정, "돈은 무제한 공급할 테니 마음껏 갖다 쓰라"고 한 것이다. 도입시 5조 엔이던 당좌예금 잔액 목표치는 2004년 1월 이후 30조~35조 엔으로 불어났다. 콜금리도 0%였다. 금융시장에 심리적 안정감을 불어넣어 기업으로 돈이 흘러가도록 유도하려는 긴급처방이었다. 5년 만에 그 효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 1월까지 4개월 연속 안정적 플러스로 돌아섰다. 은행들도 부실 채권을 대부분 털어냈다. 각종 경제지표도 디플레 탈피를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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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는 "'제로금리'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통화정책의 조절 수단을 금리로 변환한 만큼 물가상승에 따라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시장의 혼란을 우려해 당분간 단기금리를 0%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매달 1조2000억 엔 규모의 국채 매입을 계속하는 등 시장 개입을 하기로 했다. 2000년 8월 '반짝 경기회복'을 믿고 섣불리 제로금리를 해제했다 금리 인상→기업 자금 부담 증가→설비투자 감소→경기 위축→디플레 심화의 낭패를 봤던 반성에서다. 일본 정부가 끝까지 일본은행의 양적 완화 정책 해제를 늦추자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 전문가들은 "양적 완화를 중단한 만큼 결국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본은행이 '바람직한' 물가상승 수준으로 전년 동월 대비 0~2%(중간치 1%)란 수치를 명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 물가상승률이 1%를 넘어 2%에 가까워지면 금리를 올리겠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3일 발표된 1월 중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0.5%였다. 이미 장기금리는 지난주부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주가는 9일 금리 인상에 대한 우려보다 "비정상적 상황이 끝나고 경제가 정상궤도로 진입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일본의 통화정책 전환은 국제 금융시장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실제로 금리가 오를 경우 엔화의 강세가 예상된다. 이에 맞물려 현재의 엔화에 대한 원화 강세는 주춤해질 공산이 커 수출에 다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부정적인 면도 있다. 그동안 제로 금리를 이용해 한국 증시에 유입됐던 엔화 자금이 일본의 금리 상승 여파로 회수될 경우 증시에 부담을 주게 된다. 미국으로 몰리던 투자자금이 엔화 강세와 함께 일본으로 상당 부분 흘러가는 등 국제적인 자금 흐름이 일부 바뀔 가능성도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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