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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세밑 천수관음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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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병 속의 버들가지 언제나 여름. 바위 앞의 푸른 대나무 온 세상이 봄(甁上綠楊三際夏 巖前翠竹十方春)’.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홍련암 기둥에 붙은 주련(柱聯)의 마지막 구절이다. 지난 성탄절에 찾아간 홍련암은 시절을 잊은 듯했다. 겨울 칼바람에도 암자 주변 대나무와 소나무는 푸르고 푸르렀다. 암자 앞 바위를 때리는 억센 파도를 넉넉하게 받아 주었다.

홍련암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기도처다. 새해 일출을 보려고 해마다 수만 명이 몰린다. 딱히 소망이 있어 암자를 찾아간 건 아니었다. 겨울 바다를 둘러보자는 가벼운 기분에서였다. 그럼에도 주련을 읽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대통령 탄핵과 북핵 도발, 유난히도 스산했던 정유년(丁酉年)이 슬라이드처럼 돌아갔다. 영국 시인 셸리의 ‘서풍부(西風賦)’ 한 대목을 읊조렸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

홍련암 한복판에는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이 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을 보살폈다는 자비의 보살상이다.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이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성불까지는 아니더라도 2017년을 버텨 온 사람들의 꿈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나는 얼마나 이웃을 생각하며 지냈을까를 돌아봤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너희가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는 성경 구절에 가슴이 찔렸다.

겨울철 극장가에 지옥 바람이 후끈하다. 영화 ‘신과 함께’가 개봉 1주 만에 관객 500만을 넘어섰다. 살인·나태·거짓·불의·배신·폭력·천륜 7개 지옥에서 7번 재판을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할 수 있다는 줄거리다. 살인·폭력은 둘째 치고 나태·거짓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 것, 게다가 전쟁 공포에 휩싸였던 올해에 마침표를 찍는 영화치고는 시절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 불화 ‘시왕도(十王圖)’가 있다. 저승에서 재판을 관장하는 왕 10명과 지옥에서 발버둥치는 중생들이 등장한다. ‘신과 함께’의 원조로 부를 만하다. 내년 무술년(戊戌年)에도 지옥은 계속될, 아니 더 드세질 것으로 보인다. 진정 탈출구는 없는 걸까. 누군가 홍련암에 『법구경』 구절을 걸어 놓았다. ‘건강이 최상의 이익, 만족이 최고의 자산(無病最利 知足最富)’. 천수관음상의 손길이 두두물물(頭頭物物)에 미치는 새해를 기다려 본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