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언론이 해야할 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경제는 발전했지만 정치는 뒤졌다는 말이 있다. 이런 논법을 빌자면 지난해 벌어졌던 우리 나라의 정세는 경제·사회·문화 등 민간부문의 반란이요, 민간부문이 정치를 포위, 공격한 형국이었다고 할 만하다. 정치권력의 틀을 다시 짜고 정부의 권한과 기능을 근본적으로 손질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경제사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한계의식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처럼 우리의 정치는 스스로 낙후된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부문의 활력을 억누르고 발목을 잡는 훼방꾼 노릇을 해왔다.
우리 나라의 정치상황이 그리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 특히 집권자들의 잘못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우리 스스로의 권위주의적 성격과 경제사회 변화에 미처 따르지 못한 정치의식·시민의식의 미숙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두가지 원인의 상호작용은 모두의 냉정한 자기 반성을 필요로 한다.
노태우 정부는 푸짐한 약속을 했으나 당장은 권위주의적 색채를 없애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러저러한 몸짓·말투·치장 등을 고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본질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국민들에게 어떤 심리적 쾌감을 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문화인류학의 개념가운데 이른바 가치의 전도라는 것이 있다.1년에 한번 마을사람들이 추장에게 욕을 해대고 돌팔매질을 한다. 추장은 권좌에서 굴러 떨어지고 숲 속으로 도망친다. 물론 한시적인 하나의 의식이다. 나는 요즘 우리 국민들의 정신상태가 이와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은가 의심한다(그 추장이 숲 속에서 다시 나타날 때는 여전한 권위와 힘을 지니고 군림한다) .
사실 노태우 정부엔 앞으로의 정치일정 등을 전망할 때 자자부제한 소도구를 주무르거나 겉치장을 하는데 골몰할 여유가 없다. 막바로 권력기구의 대담한 개혁에 착수해야 하고 본질적인 개선에 나서야 한다. 여기에는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할 일」이 있겠는데 급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려내 지체없이 실행에 옮기는 일이다. 사회 전면에 걸친 감시망을 철폐하고 무불간섭의 관권남용을 최대한으로 억제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돈이 드는 일은 아니다. 이런 노력은 게을리 하고 겉으로 생색을 내고 돈들여 선심을 쓰는데 쏠리게된다면 정권의 자기변신은 물론 사회 전반의 개혁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구석구석에 번져 있는 권위주의적 성격과 지나친 정부 의존적 경향을 자체비판하고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시에 사회 각 분야의 자율화도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가꾸어 나가는 것이란 신념이 있어야 한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고 책임을 실천할 때 오만한 권력도 멈칫하게될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 자존의 시대를 열자고 했지만 그 출발점은 개인의 자존일 것이다. 권력은 개인의 자존을 훼손하는 일체의 행동을 중지해야하며 개인은 자율적 규범을 실천함으로써 자존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처분」만을 기다리는 자세는 또 다른 개임과 간섭을 자초한다. 진정한 의미의 주인의식은 정부가 국민에게 선물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요새 정부는 언론의 눈치를 꽤나 보는 것 같고, 또 언론도 그걸 즐기고 있는 듯하다. 면밀한 연출에 이용당하고 있는 느낌도 없지 않으나 아뭏튼 언론의 힘이 커진 것만은 사실이고 그럴수록 언론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문제의 소재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진실의 구조를 철저히 드러내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 개혁은 다른 사람의 일이고 우리는 그저 흥분하고 꼬집고 신통해하고 후련해하는 정도의 대응으론 이번엔 언론이 처진다는 소리를 들을 염려가 있다.
흔히 정치권력과 언론의 대립관계를 말하면서 언론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실은 언론은 국민과 국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뜻이라야 옳을 것이다.
문제의 소재를 제대로 못보고 현상을 좇는데 급급하여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또 「보통사람」들의 고민과 희망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보통사람들과 동떨어진 특수한 언론이 될 우려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른바 제도권 밖 언론의 영역이 넓어질지도 모른다.
서두에 민간부문이 정치를 포위, 공격했다는 말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계속되어야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거대한 역사의 전환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 아닌 다른 정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야당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 야당통합의 몸부림을 보면서 정부에 대한 것과 똑같은 차원에서 야당 측에 대한 국민의 압력을 느낄 수 있다.
정치는 「항복」하는데 머무르지 말고 고통스런 자기 혁신을 이룩해야할 것이고, 개개인은 정치가 주도하는 역사의 진전이 아니라 국민적 역량이 전환기를 주도한다는 생각을 가져야할 때일 것이다.<끝> 서기원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