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온유해지나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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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호 19면

화가 요셉 슈틸러가 1820년에 그린 베토벤 초상화. ‘장엄미사’ 악보를 들고 있다.

화가 요셉 슈틸러가 1820년에 그린 베토벤 초상화. ‘장엄미사’ 악보를 들고 있다.

베토벤은 자존(自尊)의 화신이었다. 화가 슈틸러(Joseph Karl Stieler)가 그린 초상화를 보면 입술은 한일자로 꽉 다물고 쏘아보는 눈은 오금을 저리게 한다. 산발한 백발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다. 손에 ‘장엄미사’ 악보를 들고 있으니까 50세 무렵인데도 그렇다.

an die Musik: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

유명한 일화가 있다. 베토벤은 빈을 방문한 괴테와 길을 걷고 있었다. 마침 오스트리아 황후가 귀족에 둘러싸여 맞은 편에서 오고 있었다. 길은 좁았다. 베토벤이 말했다. “저들이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거요. 계속 걸읍시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서서 모자를 벗었다. 베토벤은 모르는 체 계속 걸었고 황후 일행은 길을 양보하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 일은 결국 두 예술가의 만남을 끝장냈다.

계몽의 시대를 앞장서서 살았던 베토벤에게 귀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귀족이란 ‘누군가에게 훈장이나 작위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인이나 작곡가를 만들 수는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담을 쌓고 지내지는 않았다. 황제의 아들인 루돌프 대공은 평생의 후원자였으며, 하이든 모차르트와 달리 최초의 프리랜서였던 베토벤에게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은 주요 수입원이었다.

1799년 헝가리 브룬스비크 가문의 두 딸 테레제와 요제피네가 빈에 왔다.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베토벤은 동생 요제피네와 사랑에 빠졌다. 그의 삶에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불멸의 연인’의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그녀다. 하지만 요제피네는 집안의 강요로 27세 연상의 다임 백작과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5년 뒤 다임이 죽자 베토벤은 다시 요제피네와 열정을 불태운다. 십여 통의 편지가 전해지는데 뜨거운 표현이 가득하다. 그녀를 사랑한 것이 분명하다.

당시의 베토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음악이 웅변한다. 요제피네와 다시 사랑에 빠져들던 1806년 무렵의 작품에서 베토벤 특유의 근육질이 사라진다. 소박한 4번 교향곡, 장중하지만 밝은 기운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따스한 피아노 협주곡 4번이 이 시기에 태어났다.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는 5번 ‘황제’가 음악적 쾌감에선 최고지만 예술적 깊이는 4번이 앞선다. 음악이 선사하는 위로와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돌이켜 보니 40대 이후로는 5번을 꺼낸 적이 거의 없다. 대신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과 폴리니의 피아노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4번을 휴일 아침에 울려 놓고 나른한 휴식에 빠져들곤 했다.

피아노 독주가 협주곡의 서막을 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황제’가 과시적인 기교를 뽐내는 데 반해 4번은 참으로 여리다. 가만가만 몇 번 건반을 두드릴 뿐이다. 이어 오케스트라가 같은 선율을 나직하게 반복한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 같다. 완전히 무장해제한 2악장에 대해 프란츠 리스트는 “복수의 여신을 진정시키는 오르페우스”라고 표현했다. 빠른 3악장도 기쁨에 젖어 있다. 베토벤의 약동하는 심장이 느껴진다. ‘무례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사내는 흔적도 없다. 사랑은 괴팍한 사내를 이토록 온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열정은 길지 않았다. 1807 가을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다. 베토벤의 열정은 모든 것을 걸듯 뜨거웠지만 일시적이었다. 다시 ‘베토벤’으로 돌아간 그는 1804년부터 진행하다 밀쳐두었던 교향곡 작곡에 몰두했다. 5번 ‘운명’이었다. 엄격하고 진지한 그 음악은 사랑에 빠져 행복에 겨운 사내가 쓰기에는 불편했다.

음반에 바늘을 내린다. 피아노가 조용히 울리고 오케스트라가 화답한다. 베토벤과 그녀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그들은 가고 없지만 음악은 영원하고, 사랑도 계속된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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