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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억만장자 사회에 나타난 ‘아테나 파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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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호 19면

런던 아이(London Eye)

영국 파운드화인지 아니면 미국 달러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백만장자가 되는 것 자체가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미국의 한 비즈니스맨이 최근 내게 “백만장자는 더 이상 입에 올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집 값이 껑충 뛰고 이런 저런 연금 덕분에 자신의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백만장자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억만장자는 발에 채일 만큼 많지 않다. 다만 더 이상 극소수는 아니다. 억만장자 숫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늘었다. 스위스 금융그룹인 UBS 등에 따르면 주요 나라의 전체 억만장자 숫자는 1580명에 이른다. 이는 억만장자 20명 이상이 살고 있는 국가를 기준으로 한 수치다.

아시아 부호들 미국보다 많아져 #한국은 재산 대부분이 상장 주식 #젊은 억만장자 흔쾌한 기부 성향 #향후 20년 새 2조4000억 달러 예상

억만장자는 2016년 한 해 동안 10% 늘었다. 그들의 재산도 눈에 띄게 불었다. 지난해 17.8% 늘어 6조 달러(6540조원)에 이른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4조 달러 정도다. 억만장자의 재산은 1995년 이후 21년 새에 6배 정도 증가했다. 같은 기간 MSCI 글로벌지수에 편입된 기업의 전체 시가총액은 4배 정도 늘어났을 뿐이다. 세계 최고 부자는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조스다. 아마존 주가 변동에 따라 하루하루 바뀌기는 하지만 올해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에 그의 재산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글로벌 억만장자 순위에서 빌 게이츠 MS 설립자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중국·홍콩 387명으로 미국(563명) 추격

눈에 띄는 풍경 하나가 있다. 부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최근 처음으로 아시아의 억만장자 수가 미국을 능가했다. 675대 563이다. 지난해에만 아시아 억만장자들이 25% 정도 늘었다. 중국 거대 기업의 등장이 가장 큰 힘이다. 반면 지난해 새로 태어난 억만장자는 25명밖에 되지 않았다. 증가율로 따지면 5% 남짓이다. 지역별로 보면, 중국은 홍콩까지 포함해 억만장자 387명을 보유하고 있다. 인도는 100명에 이른다. 인도가 최근 억만장자에 우호적이지 않은 정책을 쓰고 있지만 빠르게 늘고 있다. 유럽의 억만장자는 342명이다. 여전히 미국은 억만장자의 가장 큰 홈그라운드지만 아시아가 빠르게 추격하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아시아 억만장자의 전체 재산은 2016년에만 33% 정도 불었다. 이런 흐름이라면 앞으로 4년 안에 아시아 억만장자의 부가 미국 부자들을 넘어선다.

한국은 억만장자 숫자 면에서 톱 10에 진입했다. 일본은 12위에 그쳤다.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최근 한국 기업들이 혁신을 거듭해 부를 축적한 사실을 보여준다. 억만장자 1인당 부를 보면 홍콩이 40억 달러에 이른다. 아시아 지역 톱이다. 한국은 24억 달러 정도다. 다만 한국의 억만장자들이 보유한 전체 재산은 900억 달러에 이른다. 원화 가치가 미국 달러 대비해 꾸준히 오르면 그들의 달러 표시 재산 규모도 더 불어날 듯하다.

무엇이 신흥 억만장자를 탄생시키고 있을까? 먼저 눈에 띄는 요인은 주가 상승이다. 다음은 소매 판매 증가다. 주가와 소매 판매가 조정받으면 억만장자 수가 줄 수는 있지만 적잖은 부호들은 생존 가능할 듯하다. 그런데 주가 상승보다 더 의미 있는 요인이 있다. 2016년 가장 많은 부가 늘어난 분야는 바로 기술혁신(23%)과 이를 바탕으로 한 창업(28%)이었다. 금융과 소매가 부의 증가에 기여한 몫은 각각 16%와 8%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부의 증가를 가능하게 한 근본 원인은 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시장 자유화의 확산이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상장 기업보다 가족 기업 형태를 선호했다. 유럽 억만장자 40%만이 상장 기업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그들을 ‘올드 머니(old money)’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반면, 아시아 억만장자의 63%는 상장 기업의 지분을 쥐고 있다. 미국은 37%만이 상장 기업 주주들이다. 유럽보다 수치가 낮다고 이들도 올드 머니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미국에서 새로 세워진 기술기업들이 사모펀드의 투자를 받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국의 억만장자 90%가 상장 기업 주주들이다. 재벌 오너 가문들이 상당수이기는 하지만 한국 억만장자 주식 대부분은 상장돼 있다.

한국 억만장자 중 여성이 16% 달해

여성 억만장자 비중의 또 다른 이름이 ‘아테나 인수(Athena factor)’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 이름을 땄다. 글로벌 기준에서 아테나 인수는 11% 정도다. 이 비중은 상당 기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 그런데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아테나 인수를 자랑한다. 전체 억만장자 38명 가운데 6명, 달리 말해 16% 정도가 여성이다. 미국의 아테나 인수는 12%, 홍콩은 14%, 중국은 7%, 일본은 6%다. 한국은 이 항목에서 아주 예외적일 뿐 아니라 유럽(17%)과 비슷하다.

세계 억만장자 평균 나이는 63세다. 지역별로 좀 차이가 난다. 유럽과 미국의 평균 나이는 각각 66세와 67세다. UBS 등에 따르면 아시아 부호들은 평균 나이가 53세로 미국보다 6년 젊다. 나라별로 보면 한국은 59세이고 중국은 55세다. 평균 연령 차이는 신경제와 구경제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런 차이는 점점 더 커질 듯하다. 기술기업 창업자들이 평균 47세에 억만장자 지위를 차지하는 반면 다른 부문 사람들은 59세에나 억만장자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 부를 차지하기 위한 욕망은 썩 달갑지 않을 수 있다. 머니게임을 다룬 영화 ‘월스트리트’의 비양심적인 주인공 고든 게코를 떠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탐욕은 좋은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도전적인 창업자나 혁신가, 모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에너지가 충만한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억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꽤나 적극적으로 돈을 쾌척한다. 예외가 있기는 하다. 베조스는 전체 재산 가운데 0.1%인 6800만 달러를 기부했을 뿐이다.

부호들의 기부는 늘어날 전망이다. 앞으로 20년 동안 억만장자들의 기부 규모가 2조4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GDP와 비슷하다. 이런 기부와 함께 억만장자 노령화도 부의 지형을 바꿔놓을 전망이다. 그들의 재산이 상속되면서 부가 베이비 부머 세대에서 21세기 세대로 이전될 전망이다. 이는 세대 간 부의 차이를 좁혀줄 수 있다.

로리 나이트
전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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