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칩거 8년째 '고독의 여인' 천경자가 손짓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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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내 그림을 금색(金色) 동색(銅色)으로 물들여보고 싶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에 부처님 같은 자비로운 표정을, 별에서 날아온 듯한 싸늘한 외계인의 표정을 깃들이게 하겠다. 지나고 보면 모래탑이 될망정 말이다." '자유로운 여자' 중에서

"서울에 새 눈이 내리고, 내가 적당히 가난하고, 이 땅에 꽃이 피고, 내 마음속에 환상이 사는 이상 나는 어떤 비극에도 지치지 않고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삶은 그림과 함께 인생의 고달픈 길동무처럼 멀리 이어질 것이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중에서

등꽃처럼 처져 내리는 노란 꽃무늬가 화가 천경자씨의 흐느낌처럼 마음을 적시는 1982년 작 ‘황금의 비’.

뱀.꽃.새.나비, 그리고 여자. 화가 천경자(82.사진)씨가 즐겨 그린 소재는 화려하면서도 슬픈 족속이다. 화면 가득 흐드러진 꽃은 하르르 지게 마련이다. 눈망울이 큼직해 외계인처럼 보이는 여자 얼굴에는 귀기(鬼氣)가 서렸다. 눈이 부시게 고와서 바라보다 가슴이 찡해지는 그림 속에 탱고처럼 고독이 흐른다.

스스로"화가의 일생이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가정과 인간의 애정이 캔버스에 물감을 문지르는 황홀감과 공존하다가도, 깊이 외길로 빠져들다 보면 가정도 사랑도 혈육마저도 떨쳐버리게 되고 한평생 고독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고 밝혔듯, 그 그림의 고갱이는 고독이다. 고독 자체라기보다는 고독에의 앓음이다. "지구에서 하염없이 짓밟혀 온 콩알 만한 존재의식 때문에 스스로 내가 가엾어진" 화가는 오로지 작품에 목숨을 걸고 쾌감과 공포가 엇갈리는 화면 속에 자진한다. 작두 타는 무당처럼.

'천경자-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8일~4월 2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두가헌 갤러리)에서 만나는 화가의 그림자 역시 고독이다.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붓을 놓고 칩거중인 화가는 말없이 보낸 작품 200여 점 속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들어앉았다. 46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니 화력(畵歷) 60년이다. 미공개작인 '단장'부터 제목 없는 미완성 작품까지 한국 화단이 손꼽는 '정한(情恨)과 환상의 채색화가' 천경자씨는 인생의 황혼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화가가 평소 즐겨 입었던 옷과 좋아하던 각종 수집품이 전시장 구석구석에 놓였다. 붉고 푸른 원색의 문양, 곱고 여린 장식품 속에서 그가 느꼈을 인생의 허무와 그래서 더 강렬했을 그림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온다. '가는 길 허망해도 갈 때까지는 빛나리라'는 그의 화폭은 업(業)을 푸는 그만의 푸닥거리다. 천경자의 화풍은 한국 화단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샤머니즘의 맥을 보여준다. 사랑과 고독이라는 몹시 내밀한 개인사를 그림으로 씻어낸 그는 이제 꽃처럼 나비처럼 가볍다. 02-2287-350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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