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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자 얘들아, 아프지 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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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골프 선수 박성현 닮았다는 소리 들어봤죠?” 그 말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어색함을 덜어보려는 인사치레인 줄 알았다고 했다. 마침 박 선수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3관왕 타이틀을 거머쥐며 일약 뉴스의 중심에 섰던 무렵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왜 머리를 그리 짧게 깎았어요?” “원래 옷을 그런 식으로 입고 다녀요?” 면접 중 상당 시간이 외모 관련 문답으로 흘러갔다. 나머지도 가족 관계 등 사적인 문제를 시시콜콜 캐묻다 지나가 버렸고. 취업준비생인 딸아이가 얼마 전 겪었던 생애 첫 입사 면접 얘기다.

민주화 이뤘다지만 일상 속 민주주의는 미완의 숙제 #청년들 분노 더 커지기 전에 부모 세대 책임 다해야

서류 전형과 필기 시험, 토론 심사까지 거친 뒤 치르게 된 이번 면접을 앞두고 딸애는 여러 예상 질문을 떠올리며 모범 답안을 궁리해봤다고 한다. 숙의민주주의나 탈원전 정책 등 최근 시사 이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가다듬는가 하면 혹시 나올지 모를 돌발 영어 질문에 대비한 연습도 해뒀다. 하지만 헛수고만 한 셈이 됐다. 처음엔 어이없다며 씩씩대던 아이는 시간이 흐르자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만일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땐 순순히 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해도 될까. ‘죄송하지만 제 자질과 능력을 보여드릴 수 있는 질문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그 얘길 들으며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또 미안했다. “그 회사가 이상한 거지 앞으론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라고 장담할 수 없어서. 그리고 이렇게 구린 세상밖에 물려주지 못해서.

어쩌면 부모 세대인 우린 그동안 할 만큼 했다며 자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날에 치러낸 6월항쟁, 30년 만에 다시 거리로 나섰던 ‘촛불혁명’을 통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진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자녀 세대를 좌절시키는 매일매일의 현실은 ‘이 정도면 살 만한 것 아니냐’며 이제 그만 안주하고 싶은 우리의 등을 또 떠민다. 민주화를 넘어 일상의 민주주의를 이뤄내야 할 숙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놓고 외모를 트집 잡는 면접관 외에도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비민주적 잔재가 여전히 곳곳에 차고 넘친다. 학생들을 노예인 양 부리는 갑질 교수들, 권위주의에 찌들어 직원들 말문을 막는 꼰대 상사들…. 이런 일상을 바로잡지 않는 한 우리 아이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경제 분야의 ‘민주주의’ 역시 시급하다. “차라리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 살고 싶다”는 미국 청년들이 무려 58%에 달한다는 최근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며 더욱 통감하게 된 문제다. 자본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 자본주의를 선호한다는 응답(42%)이 오히려 더 적게 나온 결과는 바다 건너 이 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나머지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불평등한 체제를 견디다 못해 청년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한 거다.

우리도 별 다를 것 없다. 청년 다섯 명 중 한 명이 사실상 실업자 신세다.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건 극소수이고 대부분 중소기업에 가거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한다. 그런데 이들 대다수의 초임이 대기업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보니 불평등이 갈수록 악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교수 시절이던 지난봄,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이 같은 현실을 설파하며 “제발 아파하지만 말고 분노하라”고 청년들을 들쑤셨었다. 이런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가 책임을 회피하니 이를 깨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건 바로 청년 세대의 몫이라면서.

장 실장의 인식에 100% 공감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청년들에게만 해내라는 건 너무하다 싶다. 일상의 민주주의도, 경제의 민주주의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미래인 만큼 우리 부모들도 더 늦기 전에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 마땅할 터다. 청년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