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불일치의 정치학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배제의 정치가 범죄의 정치라는 사실이 법원 판결의 형태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을 구속하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을 블랙리스트로 만든 게 왜 잘못이냐”는 한 언론인의 항변은 배제의 정치를 일상화했던 앙시앵 레짐의 문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유리한 목소리만 허락하고 나머지 목소리들을 죽이는 나라였다. 그들은 ‘치안(police)’을 정치로 착각했던 유구한 반(反)정치의 계승자들이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청와대 150m 인근까지 갔어도 그들의 염려와는 달리 ‘치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치란 ‘합의’가 아니라 ‘불일치’를 생산하는 것 #들리지 않던 것, 보이지 않던 것 듣고 보이게 해야

폭력은 배제의 범죄를 정치로 착각하는 시스템이 생산하는 것이다. 오히려 직업과 나이, 감성이 다른 다중(多衆)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허용될 때, 파괴가 아니라 집단적 평화가 생산된다. 우리는 지난 겨울에 이것을 경험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란 ‘합의’가 아니라 ‘불일치(dissensus)’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랑시에르(J Ranciere)의 지적은 옳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정치란 불일치를 통하여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소수에 의해 ‘적당한 것’/‘부적당한 것’의 위계로 나뉘어졌던 감성을 주변화되었던 다수가 나누어 갖는 것(‘감성의 나눔’)이다.

치안을 최선의 정치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공적인 공간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동물 같은 신음의 소리로 만듦으로써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유지된 ‘질서’는 강요된 치안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그 자체가 폭력이었고, 혼란의 진원이었다. 무의식이 완전한 형태로 억압될 수 없는 것처럼, 공적 영역의 그 어떤 목소리들도 배제의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탈근대에 이르는 유구한 세계사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감성의 나눔을 거부하는 목소리들이 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들려온다. 하나는 집권 여당을 옹호하는 집단의 ‘일부’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낡은 배에서 아직도 내리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온다. 전자는 현 정부에 대한 ‘절대적’ 지지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정당을 살리는 합당한 길은 그 안에 ‘불일치’를 허락하고, 오류의 가능성을 늘 예의 주시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진리의 독점을 허락하는 것은 다른 방향에서 ‘치안’을 생산하는 일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떼거리로 매도하는 것은 자기 정치의 활력을 스스로 죽이는 일이고,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출구를 봉쇄하는 일이다. 가령 특정 정치인에게 표를 던지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집단 성명서에는 서명을 하지 않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은 자유로우며 정치의 무오류주의를 늘 경계하는 사람들이다. 유사 집단 안에도 동질성이 아니라 불일치의 가능성이 있는 집단을 열어놓는 것이 어느 경우에나 안전하고 유리하다.

감성의 나눔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또 하나의 집단은 낡고 쓰러져 가는 배 위에서 내려오기를 아직도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낡아빠지고 촌스러운 색깔론의 깃발을 든 이들의 모습은 탈근대의 눈부시도록 세련된 문화 공간에 불시착한 외계인들 같다. 이들은 현 정부를 ‘좌파정권’이라 못 박으며 말 그대로 무조건 반대한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지금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대학 도서관뿐만 아니라 각종 지역 도서관에도 무수히 꽂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고, 아무도 공산혁명이 일어날 거란 공포에 떨지 않는 시대다. 그들이 먼 과거부터 떠들어온 ‘치안’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이념 외에는 다른 어떤 무기도 없는 무리처럼 폐쇄적인 집단도 없다. 이들에게는 제발 이젠 이념이 아니라 정책으로 ‘불일치’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